▶인사원자료 :: 인사원의 과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니체의 영원회귀] 6강 예습글

유택 2018.10.15 20:09 조회 수 : 111

들뢰즈 <니체와 철학> 제1장 비극    2018-10-18

 

1). 계보학의 개념

 

가치철학이란 참된 비판의 실현이며, 전면적인 비판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식, 다시 말하자면 철학을 <망치질>로 만드는 방식이다. 중요한 문제는 가치들의 가치, 가치가 발생하는 평가, 따라서 그것들의 창조의 문제이다. 평가는 상응하는 가치들의 미분적 요소에 의해서 정의된다. 니체는 가치가 그것의 기원에 무관심하도록 방치하는 토대라는 고상한 개념에 반대하며, 가치에 무관심한 기원을 상정하는 단순한 인과적 파생이나 평범한 시작의 개념에 반대한다. 니체는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니체는 비판을 결코 반작용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작용으로 간주한다. 비판의 활동을 복수나 앙심, 원한에 대립시킨다. 비판은 원한이란 반작용이 아니라, 현존의 능동적 양태의 능동적 표현이며, 복수가 아니라 공격이며, 존재 방식의 자연적 공격성이고, 그것 없이는 완전성을 상상할 수 없는 신성한 악의이다. 이 존재 방식은 철학자의 존재 방식인데, 그 이유는 그가 명백히 미분적 요소를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따라서 하나의 망치로 다루려 한다는 것이다.

 

2). 의미

 

만약 우리가 사물을 소유하는 힘, 그것을 이용하는 힘, 그것을 독점하는 힘, 혹은 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의 의미를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현상이란 실제적인 힘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기호이며 징후이다. 모든 철학은 징후학이자 기호학이다. 과학은 징후학적이고 기호학적인 체계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독점하는 힘들의 연속이고,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이다. 동일한 대상, 동일한 현상은 그것을 소유하는 힘에 따라서 의미가 변화한다. 그러므로 의미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니체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본질적인 복수주의를 고려해야 한다. 복수주의는 철학에 의해서 고안된, 소위 철학적인 사유 방식이다. 한 사물은 그것을 탈취할 수 있는 힘들 만큼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중립적이지 않고, 그것을 실제로 독점하고 있는 힘들과 다소간 유사하다. 그것에 제한적 의미와 부정적 가치를 제공할 때만 어떤 것을 독점할 수 있는 힘들이 존재한다.

 

3). 의지철학

 

계보학은 해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도 한다. 대상 자체는 힘force이고, 한 힘의 표현이다. 모든 힘은 어떤 다른 힘과 본질적인 관계 속에 있다. 힘의 존재는 복수다. 힘은 지배하는 것이지만 지배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니체에게서 힘의 개념은 다른 힘과 관계 맺고 있는 어떤 힘의 개념이다. 즉 이 측면에서 힘은 의지로 불린다. 의지(권력 의지)는 힘의 미분적 요소이다. 그로부터 의지철학이라는 새로운 입장이 생겨난다. 참된 문제는 명령하는 의지와 복종하는, 그럭저럭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 속에 있다. 의지는 복합적이다. 쇼펜하우어가 의지를 부정하기에 이른 것은, 우선 그가 의지의 통일성을 생각한 까닭이다. 사람들이 의지의 통일성, 동일성을 주장할 때, 필연적으로 의지를 부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영혼, 자아, 이기주의를 원자론의 최후의 은신처로 고발한다. 원자론이 힘의 그릇된 해석인 것처럼 이기주의도 의지의 그릇된 해석이다. 기원은 기원 속에서의 차이이고, 기원 속에서의 차이는 서열, 다시 말하자면 지배하는 힘과 지배 받는 힘과의 관계이며 복종시키는 의지와 복종하는 의지의 관계이다. 계보학과 분리할 수 없는 서열은 니체가 <우리의 문제>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서열은 원초적인 사실이고, 차이와 기원의 정체성이다.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과 그것을 독점하는 힘의 관계이고, 어떤 것의 가치는 복합적인 현상인 한에서 사물 속에 표현되어 있는 힘들의 서열이다.

 

4). 변증법에 반대해서

 

니체의 저작 속에서, 한 힘과 다른 힘의 본질적 관계는 결코 본질 속의 부정적인 요소로 간주되지 않는다.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는 힘은 다른 힘이나 자신이 아닌 바를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고유한 차이를 긍정하고 이 차이를 향유한다. 부정은, 적극적인 힘의 현존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차이의 긍정으로부터 나온다. 니체는 부정, 대립, 모순의 사변적 요소를 긍정의 대상이자 향유의 대상인 차이라는 실천적 요소로 대체한다. 니체에게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는 의문인 <의지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사람은 무엇을 원하고 저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의문을 그 의지를 위한 하나의 목적, 동기, 대상의 탐구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의지가 원하는 바는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다. 차이는 본질로부터 분리할 수 없고, 현존을 구성하는, 실천적인 긍정의 대상이다.

변증법을 원하는 그 의지는 무엇을 원하는가? 니체는 변증법을 평민의 사색으로, 노예의 사고 방식으로 제시한다. 주인-노예 관계의 그 유명한 변증법적인 측면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점에 의존하고 있다. 즉 권력이 거기서 권력의지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표상으로서, 우월성의 표상으로서, <어떤 이>에 의한 <다른 이>의 우월성에 대한 재인식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재인식의 대상, 표상의 재료, 경쟁의 목표로써만 권력을 이해하며, 따라서 투쟁이 끝난 후 권력을 단순히 기존 가치들에 결부시키는 것은 바로 노예이다. 주인의 헤겔적 이미지 아래서 간파되는 것은 바로 항상 노예이다.

 

5). 비극의 문제

 

니체가 <비극>이라고 명명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비극적 세계관을 두 다른 입장들, 즉 변증법적이고 기독교적인 입장들과 대립시킨다. <비극의 기원>에서 위험스럽게도 헤겔주의 냄새가 풍긴다. 왜냐하면 모순과 그것의 해결이 여전히 본질적인 원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삶은 정당화될 필요가 있고, 다시 말하자면, 고통과 모순에 의해 대속되어야 한다. <비극의 기원>은 기독교 변증법의 범주들(정당화, 속죄, 화해)의 보호 아래서 전개된다. 2) 모순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대립 속에 드러난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은 모순의 항들로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순을 해소하는 반테제적인 두 방식으로서 서로 대립한다. 즉 아폴론은 매개적으로 조형적 이미지의 관조 속에 있고, 디오니소스는 직접적으로 재생산 속에, 또 의지의 음악적 상징 속에 있다. 3) 비극은 그런 화해이고 디오니소스에 의해서 지배되는 경탄할 만한 일시적인 동맹이다. 왜냐하면 비극 속에서 디오니소스는 비극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6). 니체의 발전

 

<비극의 기원>에서 비극은 전체적인 방식으로 원초적 모순, 그것의 디오니소스적 해결과 이 해결에서의 극적 표현으로 정의된다. 모순을 재생산하고 해소하는 것, 그것을 재생산하면서 해소하는 것, 원초적 기초 속에서 원초적 모순을 해소하는 것은 비극적 문화의 특징이자, 칸트, 쇼펜하우어, 바그너와 같은 근대의 대표자들의 특징이다.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 아래 삶의 긍정은 보편자의 중심에서의 고통과 개별자를 능가하는 쾌락의 해소에 의해서만 여전히 이해되고 있다.

니체가 저작 활동의 마지막 무렵에서 <비극의 기원>에 대해서 탐구할 때, 본질적으로 혁신적인 두 가지를 깨닫는다. 하나는 바로 디오니소스의 긍정적 성격으로, 삶의 우월한 해결이나 그것의 정당화를 대신하는 삶의 긍정이다. 다른 한편, 니체는 더 나중에 완전히 벌어져야만 하는 어떤 대립을 발견했다고 만족한다. 그 이유는 <비극의 기원>의 처음부터 참된 대립은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간의 너무도 변증법적인 대립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 간의 보다 심각한 대립이라는 것이다.

 

7). 디오니소스와 예수

 

디오니소스와 예수에게서 순교자도 동일하며 열정도 같다. 그것은 동일한 현상인 반면 반대되는 두 방향이다. 한편은 고통을 정당화하는 삶, 고통을 긍정하는 삶이고, 다른 한편은 삶을 비난 받게 하고 삶에 반대해서 증언하고 삶을 정당화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만드는 고통이다. 디오니소스와 예수의 대립이 정확히 삶의 긍정(그것의 극단적 평가 절상)과 삶의 부정(그것의 극단적 평가 절하) 으로 전개된다. 디오니소스와 예수 혹은 차라투스트라와 예수 사이의 대립은 변증법적 대립이 아니라, 변증법 그 자체와의 대립이다. 즉 변증법적 부정에 반대하고, 모든 허무주의에 반대하며, 또 허무주의의 그 특별한 형태에 반대하는 미분적인 긍정인 것이다.

 

8). 비극의 본질

 

디오니소스는 나타나는 모든 것, <가장 모진 고통조차> 긍정하고, 긍정된 모든 것 속에 나타난다. 다수의 긍정이나 복수의 긍정은 바로 비극의 본질이다. 비극은 다수의 기쁨이며, 복수적 기쁨이다. 이런 기쁨은 승화, 정화, 보상, 체념, 화해의 결과가 아니다. 그래서 니체는 <비극의 기원>에서 그가 주장했던 비극관을 포기한다. 일반적인 변증법은 비극적 세계관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비극의 죽음이고, (소크라테스와 더불어서) 이론적인 입장에 의한, 더욱이 (헤겔과 더불어서는) 기독교적인 입장에 의한 비극적 견해의 대체이다. 현대의 변증법은 소위 기독교적 이데올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이데올로기와 비극적 사유 사이에 바로 공통적인 하나의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현존existence의 의미에 관한 문제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현존의 의미를 추구할 때는 항상 현존을 그릇되거나 유죄인 것으로,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부정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현존을 해석하기 위해서 어떤 신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삶을 속죄하기 위해 그것을 비난하고,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것을 속죄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현존을 평가하긴 했지만, 항상 가책의 관점에 자신을 놓고서였다. 현존이 고통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대신, 말하자면, 숭상되고 신성화되는 대신, 그것이 고통을 포함해서 긍정하는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정말로 비극적인 방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9). 현존의 문제

 

현존의 의미의 역사는 기나긴 역사이다. 그 역사는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현존의 부정의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그것에 우월하고 신성한 정당화를 찾아 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고통을 이용했다. 과도함으로서의 현존, 넘쳐남 그리고 죄로서의 현존, 그것은 바로 그리스인들이 이미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했던 방식이다.

인간이 사유를 하자 마자, 그는 사물들 속에 복수의 세균을 집어넣었다. 원한(그것은 네 잘못이다) 속에서, 가책(그것은 내 잘못이다) 속에서, 그리고 공통의 결실(책임) 속에서, 니체는 단순한 심리적 사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유태인과 기독교인의 사유의 근본적인 범주, 우리가 현존을 사유하고 해석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본다. 니체는 새로운 이상, 새로운 해석, 다른 사유 방식이란 임무를 자신에게 부여한다. 무책임성에 그것의 긍정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것. 무책임성은 니체의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비밀이다.

그리스인들이 죄를 지은 현존, <지나친> 현존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신들이 인간들을 미치광이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즉 현존은 죄인이지만, 그들에게 잘못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바로 신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죄의 그리스적 해석과 죄악의 기독교적 해석 사이의 큰 차이다.

신이 인간에게 불러일으킨 광기의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것, 혹은 십자가에 자신을 매달게 했던 신의 광기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해결책은 아직까지는 충분히 차이가 없다. 비록 전자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문제는 유죄인 현존이 책임이 있으냐 없느냐가 아니고, 현존이 유죄냐 무죄냐이다. 그때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다수의 진리를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결백, 복수성의 결백, 생성의 결백과 존재하는 모든 것의 결백이 그것이다.

 

10). 현존과 결백

 

결백은 다수의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힘과 의지의 철학의 원리에서 나온다. 모든 것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힘과 관계되고, 모든 힘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즉 그것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관계된다. 바로 서로 관련되고, 긍정하고 긍정되는 방식이야말로 특히 결백하다. 결백은 현존, 힘, 의지의 놀이이다. 긍정되고, 높이 평가된 현존, 분리되지 않은 힘, 둘로 나뉘지 않은 의지가 바로 결백의 최초의 근사치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비극적 사색가이다. 세계의 이원성을 부정했고, <그는 존재 그 자체를 부정했다.> 게다가 그는 생성을 긍정으로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존재란 없으며, 모든 것은 생성 속에 있다.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생성의 존재이다. 다수는 분리될 수 없는 표현이고, 본질적인 변신이며, 유일한 것의 항상적 징후이다. 다수는 하나의 긍정이고 생성이며 존재의 긍정이다. 생성의 긍정 그 자체는 존재이고 다수의 긍정 그 자체는 하나이며, 다수적 긍정은 하나가 긍정되는 방식이다. <하나는 다수이다.> 그는 다수의 어떤 처벌도, 생성의 어떠한 속죄도, 현존의 어떤 죄의식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성 속에서 부정적인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생성과 생성의 존재의 이중의 긍정, 요컨대 존재의 정당화라는 정반대의 것을 보았다. 되돌아오기는 생성 그 자체의 존재이고 생성 속에서 긍정되는 존재이다. 생성의 법칙, 정의, 그리고 존재로서의 영원회귀인 것이다. 그로부터 현존은 책임질 것도 유죄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11). 주사위 던지기

 

놀이에는 주사위 놀이에서의 순간들 - 즉 사람들이 던지는 주사위들과 다시 떨어지는 주사위들 – 인 두 순간이 있다. 니체는 주사위 던지기를 대지와 하늘이란 두 가지 구별되는 탁자 위에서 놀이하는 것처럼 묘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두 탁자는 두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세계의 두 시간이고, 하나의 동일한 세계의 두 순간, 즉 정오와 자정, 주사위를 던지는 시간과 주사위가 떨어지는 시간이다. 주사위 던지기는 생성을 긍정하고 생성의 존재를 긍정한다.

사람들이 한 번 던지는 주사위들은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니체는 우연으로 긍정을 만든다. 하늘 그 자체는 <우연한 하늘>로, <결백한 하늘>로 불린다. 따라서 니체가 필연(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파괴가 아니며 우연 그 자체의 조합이다. 필연은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한에서 우연에 의해서 긍정된다.

우연을 긍정할 줄 아는 것은 놀이를 할 줄 아는 것이다.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 속에서의 원한, 그것은 목적에 대한 신념 속에서의 가책이다. 우주는 목적이 없다는 것, 즉 인식할 원인이 없듯이 소원할 목적도 없다는 것이 바로 제대로 놀이를 하기 위한 확신이다.

니체는 인과성과 목적성, 확률성과 목적성의 쌍, 이 항들의 대립과 종합, 이 항들의 거미줄을 우연과 필연의 디오니소스적 상관 관계, 우연과 운명의 디오니소스적 쌍으로 대체한다. 여러 번 되풀이하는 확률이 아니라 단 한 번의 모든 우연이며, 욕망되고 의욕되고 소망된 최종 조합이 아니라, 운명적 조합, 즉 가장 사랑하는 운명적인 조합, 다시 말하자면 아모르 파티 amor fati 이고, 주사위 던지기 횟수에 의한 어떤 조합으로서의 회귀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획득된 수의 본성에 의한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이다.

 

12). 영원회귀를 위한 결론들

 

던져진 주사위들이 일단 우연을 긍정할 때, 다시 떨어지는 주사위들은 필연적으로 주사위 던지기를 한 번 더 하게 하는 수나 운명을 긍정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놀이의 두 번째 시간은 바로 시간의 통일이거나 그 통일을 위해 가치 있는 놀이꾼이다. 영원회귀는 두 번째 시간, 필연의 긍정, 우연의 모든 부분들을 다시 모으는 수이지만, 또한 최초의 시간의 회귀, 주사위 던지기의 반복, 우연 자체의 재생산이자 재긍정이다.

아마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 가운데서조차 헤라클레이토스만이 생성이 <심판 받지> 않고, 심판 받을 수도, 심판 받아서도 안 되며, 자신의 법칙을 다른 곳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고, <정의로우며>, 자기 자신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만이 혼돈과 순환이 전혀 대립하고 있지 않음을 꿰뚫어보았다.

고대의 선배들은 영원회귀 속에서 생성 그 자체의 존재, 다수의 하나, 다시 말하자면, 모든 우연에서 필연적으로 나온 필연적인 수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거기서 생성의 복종, 부정의의 고백, 그 부정의의 속죄와 같은 대립자를 보기조차 했다. 아마도 헤라클레이토스를 제외하고 그들은 <생성 속의 법칙의 현전과 필연 속의 놀이의 현전>을 보지 못했다.

 

13). 니체의 상징주의

 

니체가 자신이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선택하게 된 이유들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면, 서로 다르고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세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영원회귀의 예언자로서의 차라투스트라이다. 2). 논쟁적이다. 3). 우연이라는 훌륭한 이유이다.

혼돈 – 불 – 성좌의 이미지들의 놀이는 디오니소스 신화의 모든 요소들을 결집시키고 있다. 그러나 니체에게서 이미지의 놀이는 보다 심오한 놀이, 철학적 개념들과 사유의 놀이를 대신하지 못했다. 시나 경구는 니체의 이미지화된 두 가지 표현들이지만, 그러나 그 표현들은 철학과 더불어 규정될 관계 속에 있다. 형식적으로 고찰된 경구는 단편으로 소개되고 그것은 복수주의적 사유 형태이며, 그것의 내용 속에서 그것은 의미를 말하고 표현하길 바란다. 경구만이 의미를 말할 수 있고, 경구는 해석과 해석의 기술이다. 마찬가지로, 시는 가치들을 말하고 있기에 평가와 평가의 기술이다. 그러나 분명 가치와 의미는 너무나 복잡한 개념들이라서 시 자체는 평가되어야만 하고 경구는 해석되어야만 한다. 시와 경구는 제 차례에 해석의 대상,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경구는 두 번 읽혀져야만 한다. 주사위 던지기와 더불어서 영원회귀의 해석은 시작되지만,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것이 되돌아옴과 동시에 주사위 던지기 자체를 또 해석해야만 한다.

 

14). 니체와 말라르메

 

니체와 말라르메의 유사점 4가지. 1). 사유는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이다. 2). 인간은 놀이를 할 줄 모른다. 3). 주사위들을 던지는 것이 이치를 벗어나고,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하며, 초인간적인 것만이 아니라, 그것은 비극적 시도, 특히 비극적 사유를 구성한다. 4). 수-성좌는 세계의 종말과 그것의 정당화로서의 책, 예술 작품이거나, 그것일 수 있다.

그런 유사점들이 아무리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말라르메는 항상 필연을 우연의 소멸로 간주한다. 말라르메에게서 예술 작품은 <정의롭지만> 그의 정의는 현존의 그것이 아니라, 여전히 삶을 부인하고 그것의 실패와 무능을 전제하는 비난하는 정의이다. 말라르메의 주사위 던지기. 그것은 허무주의에 의해서 다시 파악되고, 가책과 원한의 관점들 속에서 해석된다. 그런데 긍정하고 찬양하는 맥락으로부터 분리되고, 결백과 우연의 긍정으로부터 분리된 주사위 던지기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주사위 던지기는, 사람들이 거기서 우연과 필연을 대립시킬 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15). 비극적 사유

 

니체는 허무주의를 삶을 부정하고 현존을 비하하려는 시도라고 부른다. 그래서 그는 허무주의의 주요 형태들, 즉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을 분석하고, 허무주의와 그것의 형태들 전부를 복수심이라고 부른다. 심리적 특징과는 거리가 있는 복수심은 우리 심리학이 의존하고 있는 원리이다. 심리학에 속하는 것이 원한이 아니라, 바로 모든 심리학은 부지불식간에 원한의 심리학이다. 우리는 복수의 충동이 심리학, 역사, 형이상학, 도덕이라고 불리는 것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힘임을 이해해야만 한다. 복수심은 우리 정신의 계보학적 요소이고, 우리 사유 방식의 초월적 원리이다. 그러므로 허무주의와 복수심에 반대하는 니체의 투쟁은 형이상학의 전복, 인간사로서의 역사의 끝, 과학들의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진실로 말해서, 우리는 원한 없는 인간이 여전히 인간일 것인가, 그를 여전히 인간으로 생각할 것인가? 그는 이미 인간과는 다른 것, 거의 초인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사유 방식>은 긍정적인 사유, 삶과 삶 속에서의 의지를 긍정하는 사유, 결국 모든 부정적인 것을 추방하는 사유를 의미한다. 그것은 미래와 과거의 결백을 믿는 것, 영원회귀를 믿는 것이다. 현존은 유죄로 간주되지 않으며, 의지 자체도 현존의 죄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즉 그것은 니체가 즐거운 소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니체에게서의 비극적인 – 즉 비극적인=즐거운 –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의욕=창조라는 위대한 등식을 놓는 다른 방식이다. 사람들은 비극이 다수의 순수 긍정, 힘의 명랑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긍정은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연을 긍정하고 필연은 우연에 속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생성을 긍정하고 존재는 생성에 속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다수를 긍정하고, 하나는 다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주사위 던지기는 비극적이다. 나머지 모두는 허무주의, 변증법적이고 기독교적인 파토스, 비극의 희화화, 가책의 코메디이다.

 

16). 시금석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체스톱은 보통 사람들이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비판할 수 있는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도덕을 중지시키고 이성을 전복시켰다. 그러나 원한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그들은 그들의 힘을 여전히 금욕적 이상 속에서 길어 올렸다. 그들에게는 긍정의 의미, 외재화의 의미, 놀이의 결백성이 부족하다. 뛰어넘기는 춤추기가 아니며, 내기하기는 놀이하기가 아니다. 니체는 우리가 다른 놀이, 다른 놀이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인간적인-너무도 인간적인 현존의 두 가지 양태 저편에서 초인을 발견했으며, 모든 우연을 조각 내고 그 한 조각이 주인처럼 말하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그것을 긍정할 수 있었고, 혼돈을 부정할 어떤 대상으로 삼는 대신 긍정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원한, 가책, 금욕적 이상, 허무주의는 모든 니체주의자들의 시금석이다. 바로 거기서 그가 비극의 참된 의미를 이해했는지 또는 오해했는지를 드러내 보일 수 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에세이자료집] 2019인사원_니체 :: 너희가 니체를 알겠지?! [1] oracle 2019.01.31 663
685 [니체의 영원회귀] 7강 예습 쪽글 floor 2018.10.25 76
684 [니체의 영원회귀] 7강 예습글 유택 2018.10.23 64
68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강 쪽글 [1] 로라 2018.10.22 153
68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가의 꿈을 이루어가는 이야기_20181022 [1] 선완규 2018.10.22 211
681 [회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1] minhk 2018.10.22 196
680 [니체의 영원회귀] 6강 질문을 대신하여 적는 후기 sora 2018.10.19 94
679 [니체의 영원회귀] 6강 "니체와 철학" 제1장 발제문 달공 2018.10.18 177
678 [니체의 영원회귀] 인사원_니체_쪽글_6주차_니체와철학_1장 미라 2018.10.18 113
677 [니체의 영원회귀] 6강 쪽글 file sora 2018.10.18 62
676 [니체의 영원회귀] 6강예습 쪽글 floor 2018.10.18 68
675 [니체의 영원회귀] :: 6강 예습쪽글 - [니체와 철학]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 oracle 2018.10.18 190
67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뱅퇴유 소나타의 소악절을 찾아서 [3] 로라 2018.10.17 712
» [니체의 영원회귀] 6강 예습글 유택 2018.10.15 111
67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의 사랑 : 우리는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지 않을까? [1] ㅈㅎ 2018.10.15 173
671 [회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2 [2] file minhk 2018.10.15 260
670 [회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1 file minhk 2018.10.15 308
66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결석계 경호 2018.10.15 61
668 [니체의 영원회귀] 5강 후기, 그가 나에게 다가왔다 [2] file 구르는돌멩이 2018.10.14 154
667 사랑, 존재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과제) [1] 휘파람 2018.10.13 120
666 [니체의 영원회귀] 인사원_니체_쪽글_5주차_하이데거의 니체(2) 미라 2018.10.11 113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