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형이상학과 관점주의
서문이 관점주의로 해석한 자유정신의 창안-시험-질병-회복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면,
1장은 형이상학의 기원을 비판하고, 비논리성ㆍ불공정함ㆍ삶에 대한 오류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과 관점주의는 모두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론으로, 가치평가의 방식에서 대칭적입니다.
형이상학이 불변하는 영원한 진리, 초월적 선, 참된 세계 같은 절대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관점주의는 불변하는 절대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으며 관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고 봅니다. 따라서
형이상학이 본질/현상, 선/악, 진리/오류의 이분법에 입각하여 세계를 사유한다면,
관점주의는 세계에는 본질-현상, 선-악, 진리-오류는 관점에 따라 이동한다고 봅니다.
[2] 형이상학적 사유방식
① 형이상학이라는 명칭의 유래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는 말은 “형이상자(形而上者)를 道라 하고, 형이하자(形而下者)를 氣라 한다”는 주역(周易) 계사(繫辭)에서 유래합니다. 형이상학의 영문명칭인 메타피직스(meta-physics)라는 말은 기원전 1세기 그리스 철학자 아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을 편찬하면서, 제1철학에 관한 책(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에 관한 보편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을 제1철학이라 불렀다)이 자연학(physica)에 관한 책 다음에 놓였으므로 '자연학 다음의 책(ta meta ta physica)'이라고 불린 데서 유래합니다.
② 형이상학의 일반적 의미
형이상학은 일반적으로 사물의 본질이나 세계의 근본원리를 다루는 학문분야입니다. 형이하학(形而下學)이 형체 이하의 것을 다루는 학문(형체가 있는 사물에 관한 학문)으로 물질적 형태인 주로 자연과학을 의미한다면, 형이상학(形而上學)은 형체 이상의 것을 다루는 학문(사물의 본질이나 세계의 근본원리를 다루는 학문)으로 관념적 형태인 신학(종교), 철학(도덕), 예술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③ 형이상학의 비판적 특징
형이상학은 ‘초월적 사유’와 ‘이분법적 사유’를 특징으로 합니다. 형이상학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현상계)의 본질이 되는 세계(실재계)를 탐구합니다. 형이상학은 가변적이고 유한한 우리의 경험세계(이 세계, 현상계)와 달리, 영원불변하고 초경험적ㆍ초자연적 세계(저 세계, 실재계)가 있다고 믿으며, 참된 진리나 아름다움은 그 세계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초월적이고 이분법적 접근은, 플라톤의 ‘이데아’(현실세계과 이데아세계), 칸트의 ‘물 자체’(현상과 물 자체)와 기독교의 사고방식(죄 많은 이 세계와 천국이 있는 저 세계의 이분법)이 대표적입니다.
철학적 문제들은 2천년전과 동일한 질문형식을 택하고 있다. “그 무엇이 어떻게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에서부터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이성적인 것이 비이성적인 것에서, 감각이 있는 것이 죽은 것에서, 논리가 비논리에서, 무관심한 직관이 열망에 찬 의지에서, 이타적인 삶이 이기주의에서, 진리가 오류에서 생길 수 있는 것일까?” ...... 형이상학적 철학은 “어떤 것이 다른 것에서 생겨남을 부정하며, 더 높은 가치를 지닌 사물 자체의 본질에서 직접적으로 생겨난다”는 기적같은 기원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런 문제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_《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3] 관점주의적 사유방식
관점주의는 '가치평가에서 관점주의'를 말하는 것이며, '관점에 따른 가치의 이동'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① 관점주의가 ‘관계의 문제’일 때
먼저, 관점주의가 관계의 문제일 때, 자연과 사회의 경우를 들어보겠습니다.
[자연에서 관점주의] 깊은 산 오솔길 옆 작은 연못에는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었지요. 큰 물고기에게는 행복한 일이, 작은 물고기에게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지만, 그 연못(자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회에서 관점주의] 맑스는 [자본]에서 노동일을 둘러싼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을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일을 연장하고 1노동일을 2노동일로 만들려고 애쓰는 경우, 그는 구매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가 노동일을 표준적 길이로 제한하려는 경우, 그는 판매자로서 그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 사이에서는 힘이 사태를 결정짓는다.”
그런데 관점주의적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모든 사태를 선/악 혹은 진리/오류로 구분하는 형이상학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약자는 옳고 강자는 그르다거나, 내게 유리한 것은 선이고 불리한 것은 악이라는 가치평가를 넘어서, 관점과 맥락에 따라 자유로운 가치평가를 가능하게 합니다.
② 관점주의가 ‘주체의 문제’일 때
그럼, 관점주의가 '주체의 문제'일 때,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태도를 사례로 들어보겠습니다.
[기존의 가치에 복종하는 방식] 불변하는 절대적 가치와 이분법적 대립이라는 형이상학적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방식]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의 한계를 깨닫고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가치를 극복하는 방식] 형이상학에 대한 ‘관점주의적 긍정’으로 형이상학조차 긍정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처음 방식을 시대성으로, 다음을 반시대성으로, 마지막을 비시대성으로 정의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관점주의를 획득한다는 것은 실천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이고 지배적인 가치를 넘어서게 할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가치를 생성하려는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내 안의 강자를 구성하는 방식이며, 자기극복의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계기일 것입니다.
“인간이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개념과 불안에서 벗어나, 예를 들어 사랑스런 작은 천사나 원죄를 더이상 믿지 않으며,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도 더이상 말하지 않을 때, 그는 상당히 높은 단계의 교양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해방의 단계에 있다면 그는 ······ 형이상학을 극복해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후진운동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형이상학적) 표상들의 역사적이며 심리학적인 정당성을 파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류를 장려하는 최대의 힘이 어떻게 거기에서(*형이상학) 나왔고, 후진운동이 없으면 지금까지의 인류 최대의 성과를 박탈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철학적 형이상학에 관한 한 부정적 목표(어떤 긍정적 형이상학도 오류라는)에 이른 사람은 많아지지만, 그 몇단계 뒤로 가는 사람은 적다. 사람들은 사다리의 마지막 계단 너머까지 바라보아야 하지만, 그 계단 위에 서려고 해서는 안된다. 가장 계몽된 자라도 기껏해야 형이상학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정도에서 머무른다 : 여기서도 경마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트랙의 끝을 돌아서와야 하는데 말이다.” _《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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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결과 순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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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형이상학 혹은 부정적 가치들이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형이상학이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지요.
이것은 자신의 오류나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오류를 부정하면서 자괴감에 빠지거나 타인의 잘못을 지적질하다가 사이가 틀어질 뿐,
그런 방식으로 부정적 가치는 극복되지 않는단 말이지요. ㅎㅎㅎ
진정한 극복은 니체가 말한 '형이상학(혹은 부정적 가치)에 대한 관점적 긍정'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모든 오류는 반박되는 것이 아니라 긍정되면서, 오류로서의 부정성을 상실하는 게 아닐까요?
형이상학적 사유는 세계에 대한 이분법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오류에 대한 긍정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관점주의적 사유만이 관점과 맥락에 따른 자유롭고 유연한 가치의 이동이 가능할 것입니다.
'산정과 심연'이 형이상학자들에게는 대립적인 위치로 보이겠지만,
니체적 관점주의에서는 하나의 사물에 대한 관점의 이동에 불과하니까요!!
오랜만에 엇결과 댓글을 주고 받으니 좋습니다.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많고 ^.^
나중에 특정주제를 가지고 우리 '끝장 토론'을 한번 해볼까요?
매번 시간제한 때문에 토론을 끊어야 해서, 그것이 저도 섭섭해서 말이지요...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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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결과 순결
ㅎㅎㅎ 어찌 감히 오라클님과 끝장을 논할 수가......^^;
다만 세미나답게 부딪힘 속에 항상 더 큰 깨달음을 얻어온 것 같아요.
그것 역시 부정이 아닌 관점의 전환 속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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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스
중요했던 1장의 33 에서 (57p 8) 꼬이는듯한 문장을 국어학자에게 질문해보니 부정, 긍정의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지적 하더군요 문학적 중의적 표현이 아니라 번역의 오류의 가능성도 보이기도 합니다
@심한 공상 결핍증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느낄 수 없으며,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운명과 고뇌에는 가능한 한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운명과 고뇌에 관여할 수 있는자는 삶의 가치에 절망할 것이다.** ( 결핍증이란 병증이 없다면 타인의 고뇌을 생각한다, 라고 해석도 가능하겠는데요)
**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운명과 고뇌에 관여할 수 있는자는 삶의 가치에 절망할 것이다.** ㅡ 이 부분이 영문판에서는 ㅡ on the other hand, whosoever really could sympathise, necessarily doubts the value of the life ㅡ '삶의 가치에 의심' 정도로 보이는데 "doubt '라는 단어을 "절망'으로 로 표현하니 좀 난감합니다 ㅎ ( 아시다시피 독어 원문은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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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미나는 제게 참 뜻깊은, 의미있는 '사건'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발제자로서 다른 어느 시간보다 공을 들여 텍스트를 읽고 정리하였습니다만, 세미나 시간을 통해 내가 얼마나
독단적 시각에 사로잡혀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의 문제는 형이상학과 대조적 관점에서만 니체의 생의 철학을 바라보는 시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겁니다.
니체가 지적한 후진운동이 결여된 상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고자 하는 대로만 봤고, 생각했고, 정리했던 거였죠.
관점주의를 또다시 사변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텍스트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는 또다른 산으로 인정하고
그 정상을 향해 나아가야 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도 모르게 짜라에서의 소득을 기반으로 안이하게, '뭐 별다른게 있겠어?'하는 마음으로 읽었던게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어요.
세미나가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니체가 제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낄낄낄. 너는 나를 너무 얕게 봤어."라고^^;(진정 비웃음을 담고서)
개인적으로 참 좋은 세미나였어요. 앞으로 달려갈 동력을 얻은 것만 같은.......주말 잘 보내시고. 월욜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