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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개념의 성좌] 4강 후기

이희옥 2023.05.03 19:19 조회 수 : 76

 

4강은 ‘유한과 무한’에 대한 궤적을 따라가는 시간이었다. 철학 내에서도 고대에서 현대까지, 그리고 과학과 수학에서 ‘유한과 무한’은 대립하는 듯 포용하며 시대와 발견에 따라 그 사유의 궤를 선회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무한성보다 유한성에 대한 지각이 강했으나 그래도 유한적인 인간의 능력과 그 가능성을 높게 사고 있었다. 단어의 대립적인 의의에서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철학에서 유한과 무한은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 중 형상과 질료를 놓고 각각 능동과 수동의 성질이라고 이해할 때, 현대 철학의 초점은 이것을 뒤집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강사님이 유한과 무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각각의 단어들을 풀어서 설명해주셨는데, 간단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mortal(유한) / immortal(무한) 

    peras(유한) / apeiron(무한) peras를 부여받지 못한 무질서한 상태

             taxia  /  ataxia

          rational / irrational

형상form(능동) / 질료matter(수동) 현대 철학에서는 수동/능동을 반대로 보기도 함

 

위의 용어를 정리해두고 다시 강의로 돌아가면, 어쨌든 무한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1) 죽지 않음과 2) 정해지지 않음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무한)

무한에 대한 기원은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페이론apeiron이라는 개념은 근대 이전까지만 하여도 질서에 반대되고 흐트러진 개념이었고 따라서 경계해야 하는 ‘괴물의 사유’로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아페이론은 존재의 근원이 되며 위계가 없지만 그 속에 자생적 질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철학자들은 무한을 사유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들뢰즈까지 아페이론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변주를 통해 나름의 ‘차이와 반복’을 형성하고 있다. 

 

수학에서의 유한과 무한

처음 무리수의 존재가 발견되었을 때, 학계 내에서는 엄청난 반향이 일었다. 숫자를 도형으로 도형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성적인 것인데 무리수의 등장으로 견고한 규칙의 세계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질서가 있는 것에는 늘 무질서한 것들이 따라다닌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합리주의의 허약함을 마주하게 된다. 이성이라는 것을 위시하고, 늘 어떤 것에 질서를 부여해 위계를 나눈다. 자신만의 진리에 갇히는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무한

플라톤도 이러한 무한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는데,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플라톤은 세 가지로 나눈 원인 중 세 번째 원인인 환영, 즉 판타스마타phantasmata(한정되지 않은 질료 자체이자 존재이면서 비존재이기도 한)를 배척하려고 한다. 즉 플라톤에게 아페이론은 사물을 형성하는 기반에 있다고 이해하고 있으나 격퇴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아페이론은 로고스를 벗어난 신적인 어떤 것으로 아페이론을 다소 긍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Ⅺ』에서 우리의 사고에서만 가능한 무한, 즉 가무한에 대한 개념을 세우기도 한다.

 

“아페이론(무한자)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무한자는 부분을 갖지 않고 분할불가능하다. 하지만 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은 무한할 수 없다.”

 

가무한(잠재적 무한 = 수학적 무한, 물리적 무한)↔실무한(현실적 무한 = 신학적 무한)

 

근대철학의 무한 / 과학과 수학의 무한

진리를 의심하고 신과 과학의 영역을 나눈 데카르트나 “신은 즉 자연”이라는 스피노자의 말, 혹은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을 통해 가무한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무한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과학과 수학에서의 무한도 조금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수학자 칸토어가 “무한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인간은 점점 유한성의 범주를 뛰어넘는 영역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수업 마무리에 박준영 선생님이 인간은 왜 무한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는가?라는 물음으로 강의를 마무리 하셨는데, 그대로 옮겨 적으면 후기에 대한 성의가 없는 것 같아 피상적이나마 나름의 정리로 한 문단 붙여본다. 무한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고 해야 하는 이유는 강의 시작에서 정리한 무한성의 두 가지 의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한함에 속한 인간이기에 ‘죽지 않고, 정해지지 않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질서가 없고 규정되지 않은 영역이 있다면, 유한성의 이성과 체계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물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과정을 다시 무한성에서 탐구하려는 시도부터 새로운 진리의 발견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사실 개인적으로 진리라는 말을 좋아하지도 않고, 진리는 유동적이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어떠한 성취는 무한으로 향하는 발걸음에서 오는 것을 확인받은 느낌이다. 나는 어떤 발견을 하고 어떤 변주를 하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에 멈춰 섰지만,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처럼 무한성을 주춤하게 만들 시도는 또 어떤 식으로 등장할지 인간의 지성에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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