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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3.3.27]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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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선의 미학과 ‘다선일여’

‘다선일여’ 만큼이나 ‘밥선일여’이고 ‘빵선일여’

차 마시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설정하는 순간 도에 어긋나
평상심으로서의 도는 일상 하나하나를 ‘제대로’ 하라는 말
청빈이든 와비든 보여주기 되면 본말 전도된 ‘과시적 장식’

 

2023-0331_불교를 미학하다30.jpg  초의 선사 진영.

  육우가 저술한 ‘다경’.

 

한국의 선에서도 ‘다선일여(茶禪一如)’나 ‘다선일미(茶禪一味)’를 말한다. 다도를 열었다는 초의(艸衣)가 있지 않은가.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최초의 다서(茶書)는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아닌가. 아니, “차 한 잔 하시게(喫茶去)”라는 조주의 유명한 공안이 차와 도, 차와 선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면 “밥을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지!”라는 조주의 공안을 들어 설거지가 바로 도이고, 설거지가 바로 선의 종지와 하나라고 해야 한다. 조주의 공안에서 차는 선이나 도를 표상하는 특별한 대상이 아니라, 밥이나 설거지와 다를 바 없이 일상의 삶 하나하나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밥을 먹고 차 마시고, 설거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도이고, 그것이 바로 선에서 가르치는 ‘평상심’ 아닌가? 

그런 것을 행함에서 “일부러 하려는 순간 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조주의 스승 남전이 가르친 ‘무위’ 아닌가? 차를 마시는 것도, 밥을 하는 것도 특별한 것으로 설정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하려는 순간 도에서 벗어난다는 것, 그것이 ‘평상심’이란 말로 선승들이 가르치고자 한 바이다. 그러니 다선일미가 차의 맛을 선과 대등한 특별한 것으로 승격시키려는 것인 한, 그것은 선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차 마시는 것을 특별한 예법으로 양식화하려는 순간, 그것은 선사들이 그토록 경계하도록 한 함정에 빠지게 된다. 

차맛이든 불법이든 따로 구하는 순간 불법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선승들의 가르침이다. 차든 밥이든 특별한 것으로 따로 구하려는 한, 선승들의 가르침을 등지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다선일미’만큼이나 ‘밥선일미’이고 ‘빵선일미’이다. 차와 선이 일여한 것처럼 설거지와 선도 일여하며, 빵을 만들고 똥을 싸는 것 모두가 선과 일여하다. 그러니 다도만 있는 게 아니라 밥도(飯道)도 있고 빵도도 있으며, 농도(農道)도 있고 똥도(糞道)도 있다. 그 모두가 도이고, 그 모두가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아무거나’ 다 도라는 말은 아니라, ‘어디서든’ 도를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설거지도 잘하는 경우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밥이나 빵에도 더 맛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평상심으로서의 도란 아무렇게나 하란 게 아니라, 별거 아닌 듯 보이는 그 일상 하나하나를 ‘제대로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고요함이나 무의 표상을 찾는 것과는 반대방향에 있다. 

다도란 고요한 다실에 앉아 따로 정해진 동작을 하며 무위(無爲)를 표상하는 다구들에 감탄하는 예법이 아니라, 차를 제대로 마시는 방법이다. 차의 상태나 종류, 물이나 온도, 차호와 찻잔 등 그에 연하는 조건에 따라 무상하게 달라지는 맛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이로써 그때그때의 조건마다 좀더 좋은 맛을 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밥도나 빵도 또한 그러할 터이다. 밥이나 빵에서 도를 찾았다면, 좀더 좋은 맛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같은 밥, 같은 빵이라도 그것의 공능(功能)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도란 그런 식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들과 만나는 방법이다. 맛을 다루는 미학으로서의 ‘밥도’, ‘다도’도 이와 전적으로 동일하다. 

육우의 ‘다경’을 비롯해 도곡(陶穀)의 ‘천명록(荈茗錄)’, 휘종(徽宗)황제의 ‘대관다론(大觀茶論)’, 심안(審安)노인의 ‘다구도찬(茶具圖贊)’, 허차서(許次紓)의 ‘다소(茶疏)’ 등 수많은 중국의 다서(茶書)들은 자신이 찾아낸 그런 방법을 남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쓴 것이다. 초의(艸衣)가 썼다는 ‘차신전(茶神傳)’은 조선후기에 언해본까지 나온 바 있는 중국의 백과사전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발췌한 것이다. 한국 다도에 대한 유일한 ‘경전’이라는 ‘동차송(東茶頌)’의 관심사 또한 다양한 차의 맛과 향, 효능이다. ‘유현미묘(有玄微妙)’나 ‘중정(中正)’을 한국 다도의 ‘정신’이라 하는 이도 있지만, 양자 모두 차의 맛과 향을 제대로 내는 방법에 대한 개념이지 ‘도’와 상응하는 심오한 원리 같은 게 아니다.

‘다도’란 사실 이런 것이어야 마땅하다. ‘다도’를 향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차와 관련된 것에 ‘공’이니 ‘도’니 하는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어찌하면 차가 ‘제맛’을 내게 할 수 있을지 알아내고 전해주려는 마음인 것이다. 같은 차나 빵이라도 이왕이면 자신이 공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자기 몸을 내주는 그것들에 대한 예우이니, 이런 의미의 다도란 차에 대한 다인들의 우정의 표현이다. 그들을 좋은 친구로 삼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려는 것이다. 밥도나 빵도, 설거지도 또한 그러하다 할 것이다. 

이 점에서도 일본의 다도는 유별나다. 가령 와비의 다도를 특징짓는 핵심은 불균제, 간소, 고고, 자연, 유현, 탈속, 정적이라 하는데(‘다도의 철학’ 161) 이 개념들 중 차맛과 관련된 것은 없다. 다도에 불가결하다고 드는 것은 산수, 초목, 초암, 주객, 다구, 법칙, 규구 등인데(‘다도의 철학’ 201) 여기에도 차맛에 대한 것은 없다. 중국의 다도에서 찻잔은 차의 맛과 색깔 등을 좋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주된 관심사라면, 일본의 다도에서 찻잔은 어떤 게 와비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지가 주된 관심사다. 물론 이처럼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차를 적절하게 달이는 방법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고야 할 리 없겠지만, 철학적 관심이나 시각적 관심에 비해 지극히 부차적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와비를 멋지게 재현하는 것이 다도의 모든 것을 방향 짓고 있으니, 다도라기보다는 와비도(侘び道)이고 와비의 종교다. 그러나 청빈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청빈의 건축을 하는 것이 청빈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와비를 과시하기 위해 와비의 건축을 하는 것 또한 와비와는 거리가 먼 것 아닐까? 청빈이든 와비든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는 한, 본말이 전도된 과시적 장식에 불과하니까. 과도하게 부여된 의미와 과시적인 장식에 갇혀, 선이나 도는 물론 차도, 와비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건 “자신이 만들어낸 상이나 이념을 초월적 지위로 승격시키고 그것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는 의미에서의 ‘종교’가, 신학자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발견한 소외된 종교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공은 텅 빈 고요함이 아니며, 세간을 떠난 적적함이나 한가함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소음으로 가득 찬 속세 안에서 고요함이고, 객진으로 번거로운 세간에서 적적하게 있음이다. 평상심이란 중생의 평범한 일상 세계 안에서의 평온함이다. 차를 마시는 것이든, 다기(茶器)를 다루는 것이든, 텅 비어 있는 모습으로 무를 상징화하려 함은, 소란스런 중생계의 객진을 지워 불이의 도(道)로 의미화하려 함이다. 그것은 모든 상과 함께 하는 상 없는 여래를 등지는 것이고 청정법신에 특별한 색을 칠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부처도 따로 구하려 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것 아닌가. ‘다선일여’만큼이나 ‘밥선일여’, ‘빵선일여’를 보지 못한다면, 다도는 선사들의 노파심을 등지게 하는 마구니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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