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프랑스의 고등학교 철학교재로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1권의 제목이 '인간과 세계'였는데 인간학antropology이란 말이 나왔다. 칸트와 내외하고 있던 나는 인간학이란 단어부터가 생소했다. 인류학도 아니고 인간학은 참 낯설다고 말했더니 누군가 그랬다. 인간학이 뭐긴 뭐야 철학이지. 라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듯했다. 한창 인간중심주의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을 때라 더 그랬을까, 그 때 처음으로 동물권을 하려면 철학을 넘어서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비이성, 비인간 혹은 탈이성, 탈인간은 언제부턴가 내 주변을 끊임없이 맴도는 키워드다. 그리고 비이성과 비인간은 공통적으로 수용과 정치, 권리의 문제와 만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됐다. 선생님의 이번 수업의 목표가 장애인에 ‘대한’ 공부가 아니라 장애’로부터’의 공부라면 내 목표는 비인간동물’로부터’의 공부이고, 일관적으로 그러한 관점에서 동물의 그것들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분명 장애와 동물이 놓인 지형은 많이 닮은 만큼 또 다를 것이다. 싱어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동물담론을 이야기할 때 많이 쓰는 가장자리 사례를 칸트식으로 풀어보면, 생물종으로서의 인간과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인간과 인격으로 구별한다. 그런데 어떤 동물은 인격을 가졌고, 어떤 인간은 인격을 갖지 못했다. 만일 그 인간에게 인격을 부여해야 한다면, 동물에게도 인격을 부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매우 거친 논법이고 결코 전적으로 동의하긴 어렵지만(동물권을 이렇게 설명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크다), 비인간동물이 대상 아닌 주체의 자리에서 동물의 사유와 정치를 그려보고 싶다. 머리말 중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신의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다.”의 숨은 뜻은 주어진 인간과 되어야 할 인간이 있고, 그 때 남겨진 인간도 있다는 것일텐데, 질문을 바꿔보면, 동물은 인간의 선험적 조건을 공유할 수 없는지, 동물에게 칸트적 의미의 ‘자유롭다’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인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동물의 등장으로 어떻게 교란될 수 있을지,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서의 인간을 내려놓은 후 그 자리는 어떤 것으로 채워질 수 있을지를 지극히 ‘실용적’인 차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지 이번 수업이 도약하기 좋은 ‘도움닫기’가 되길 기대한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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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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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인간이 ‘나’를 말하기 시작한 날부터 거침없이 진행되고, 그 이후로는 인간과 결코 떨어지지 않는 이기주의(Egoism)를 말하면서 이기주의와 유사하지만 유의할 점으로 ‘기론’(Paradoxie)을 거론한다. 기론이란 “참이 아닌데도위험을 감수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에게만 수용될지 모르는 데도 위험을 감수하며 행하는 용감한 행위이다.”라고하면서 오히려 기론적인 것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주의와 탐구를 일깨우는 면이 있다(백, 121; 홍이, 32)고 평가한다. 또한 그는 인간에게 이기주의를 넘어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하는데, 그것은 “전체 세계를 자기 안에 포괄하는 자”로서 처신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세계시민으로서 처신하는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다.“자신을 동등한 타자들 사이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다원주의(Pluralism)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론, 공동체 내 세계시민, 다원주의를 곱씹어보다 얼마 전 일어난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서울어린이대공원 초식동물마을에서 지내던 2019년 6월생 남성 그랜트 얼룩말 ‘세로’가 스스로 나무 울타리를 부수고 동물원을 ‘탈출’해 아차산역인근 도심을 ‘누비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사육사에 의해 수차례 마취총을 맞은 후 3시간만에 동물원으로 ‘인계’된 사건이다. 세로의 탈주극은 ‘인명·재산피해 없이’ 마무리되었고 세로도 ’다치지 않았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그리고세로가 ‘탈출’한 이유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면서도 작년과 재작년 연이어 부모가 사망한 뒤에 시작된 ‘반항’으로 추측했다. 세로는 사람나이로 치면 10살 정도인데, 부모를 잃은 상실감에 옆집 캥거루와 싸우기 일쑤였고, 밥도 잘 먹지 않다 결국 탈출까지 감행했으며, 동물원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간식(당근)을 거부하며 ‘삐져있는 상태’라고 전했다.
(지구)공동체를 인간만의 전유물로 획정하거나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이 인간에만 주어진다는 주장은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칸트가 말하는 다원주의는 이제 혼종사회, 반려종 등 여러 이름으로 변주되며 윤리적, 정치적, 존재론적 담론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다. 기실 동물원 동물들의 기론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호랑이, 코끼리, 퓨마의 ‘저항행위’는 소수일지라도 그들의 주의와 탐구를 일깨운다. 동물원이라는 시설에 있는 상태는 ’자유‘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위험상태이기도 하지만, 동물원을 탈출했을 때 닥칠 위험을, 기본적으로 영역을 기반으로 생활하는 동물들이 모를 리 없다는 측면에서 이들의 ‘저항행위’를 기론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외려 나는 ‘기론’보다 더 적절하게 지칭할 수 있는말을 찾지 못하겠다. 앞으로 동물들의 기론이 촉발하는 정동들에 집중하면서 수강해나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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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hye
기사가 어떻게 바뀌는지(동물정치), 탈시설 투쟁과의 같은 점과 다른점
'비인간 동물'을 주체의 자리에 두고 동물의 사유와 정치를 상상해 보고 싶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동물의 등장으로 어떻게 교란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문제의식이 정말로 와 닿습니다.
그 사유가 가는 길도 궁금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