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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3.2.27]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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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여래의 미학과 내재적 비평

똥막대기나 쓰레기도 아름다움 기준 가질까

여래 미학은 조건에 따라 아름다운 것 될 수 있는 잠재성 의미
모든 것이 갖는 아름다움 알아보고 수긍하는 절대적 긍정 미학
20세기 현대예술은 추하다고 믿는 것을 예술영역으로 끌어와

 

피에르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
피에르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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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심검당

여래의 미학은 모든 것을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평면 위에서 본다. 아름다움 하나로 모두가 평등한 평면. 그 평면에서 낡은 것은 낡은 것이어서 아름답고 새것은 새것이어서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평면 위에 있다 함이 모두가 똑같이 아름답다 함이 아니다. 반대로 기준이나 조건에 따라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이 되기도 하고, 별 것 아닌 것이 아름다움 것으로 부상하기도 한다. 평면이란 그렇게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데 어떤 근본적 차별과 장애가 없음을 뜻한다. 애시당초 아름다울 수 없는 것도 없고, 본성상 아름다운 것도 없다. 아름다운 음악도 강의나 대화에 장애가 된다면 소음이 되고, 망치질 소리도 힘찬 소리가 필요한 곳에선 멋진 음악이 된다. 여래의 미학의 첫째 명제는 모든 것을 조건에 따라 미추를 오갈 수 있는 이 평면에 세우게 한다. 모든 것을 연기성(緣起性)의 평면에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조건에 따라 언제든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는 각자의 잠재성을 뜻한다.

그 평면에서 아름다움은 그때마다 다른 이유를 갖는다. ‘아름다움’에는 그토록 많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여래의 아름다움이란 특정한 아름다움을 특권화하지 않기에 그 모든 아름다움의 이유에 열려 있다. 여래의 미학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초월적 기준을 갖지 않기에, 대상이나 조건마다 그것을 아름답다 할 기준 모두를 긍정하는 미학이다. 초월성의 미학에 반하는 내재성의 미학이다. 특정한 기준에 맞는 것만을 선별하고 나머지는 모두 내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갖는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수긍하는 절대적 긍정의 미학이다.

조건을 떠난 초월적 척도의 미추에 매이면, 청정법신이란 “꽃으로 장엄(莊嚴)한 울타리”(운문)가 된다.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울타리는 장애물이다. 반면 그런 분별의 잣대를 떠나면, 하나를 다른 하나와 구별해주고 나누어주는 모든 울타리마다 장엄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청정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청정을 말하지만, 그 말에 다시 현혹되어 탁함과 대립되는 맑음을, 더러움과 대립되는 깨끗함을 찾게 될 것을 염려하여, 청정법신을 묻는 말에 현사(玄沙)는 “고름이 뚝뚝 떨어지느니라” 했고 법화(法華)는 “똥 냄새가 하늘에까지 퍼졌다”고 했지만, 뒤집어 보면 이는 고름이 흐르고 똥 냄새가 진동하는 것에서도 청정법신을 보라는 말 아닌가. 선의 미학 또한 그러할 터이다.

부처는 뒷간 똥막대기라고 하지만, 말이나 그렇지 똥이나 쓰레기에서 무슨 아름다움을 볼 것인가. 사실 예술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만, 망가지고 버려진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인지 20세기 예술가들은 추하다고 비난받던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한다. 쿠르트 슈비터스의 ‘메르츠’는 부서지고 버려진 쓰레기를 모아서 만든 작품이다. 피에르 만초니는 ‘예술가의 똥’이란 레이블을 붙인 통조림 캔 속에 자신의 똥을 담아 동일한 무게만큼의 금값을 받고 팔았다. 상품광고에 사용하는 화려한 색채나 만화적인 이미지를 예술화했던 팝아트 작가들도 다르지 않았고, 싸구려 상품이나 이발소 그림 같은 키치에서 소박한 민중들의 꿈을 발굴하려던 포스트모던 미학자들도 그러했다. 쓰레기와 똥마저 예술이 된다면,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아름답다! 20세기 이후 현대예술의 역사는 사실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믿었던 것들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다시 만나게 해온 역사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름답지만, 아무거나 아름답지는 않다. 먼지 하나까지 모든 것이 시방삼세의 우주를 담고 있지만, 그 하나하나가 잡난(雜難)하지 않고 격별(隔別)하듯이, 모든 것이 아름답다 하지만, 격별한 것들 하나하나마다 그것이 아름답다 할 이유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것에 대해 미추를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좀더 낫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따지는 ‘비평’마저 가능해야 한다. 불법 아닌 것이 없고 도란 매일매일의 일상이라 하지만, 불법에 부합하는 삶인지 아닌지를 ‘비판’하고, 어떻게 하는 게 좀더 도에 가까운 삶인지를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그게 없다면 불도도 미도 ‘가르침’이 될 수 없다. 그저 각자의 현재 상태를 그저 듣기 좋은 말로 상찬하는 ‘듣기 좋은 말’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비평 내지 비판이 가능하려면, 그러기 위한 평가의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는 분별을 떠나라고 해놓고, 다시 분별을 하라 하는 것 아닌가?

비례라든가 숭고함, 혹은 단순성이나 명료성, 그윽함, 다채로움 같은 것을 조건과 상관없이 미의 본성인 양 내세우는 초월론적 태도는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여래의 미학에서 미추를 말할 기준은 ‘내재적인 기준’이어야 하고, 미추의 비평은 ‘내재적 비판’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일단 쉽게 말하면, 무언가를 제작하는 이 자신이 갖고 있는 기준으로 그가 제작한 것을 평가하는 것이다. 표현적인 음색을 들려주려는 작품에 대해 선율과 화음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제대로 된 평가가 아니다. 반면 균형 잡힌 형태가 중요한 작품에서 삐뚤어진 형태는 분명히 치명적 결함이다. 어떤 작품에 대한 탁월한 미학적 비평이란 그 작품이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읽어내고, 그걸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작품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려면, 그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기준을 먼저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갖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움의 이유나 기준을 새로 창안하는 것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경우라 하겠다. 삐뚤어지고 구부러진 선에서 유머의 미학을 발견하고, 거칠고 소박한 막그릇에서 질박한 질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종종 우리는 제작자가 생각지도 못했던 기준을 찾아내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경우를 본다. 이는 전에 없는 새로운 미감의 영역을 여는 뛰어난 미학적 창안이다. 대충 만든 듯한 운주사 돌탑이나 석불들, 떠받치는 대신 춤추는 듯 삐뚤어진 개심사 기둥들의 아름다움은 ‘정통적’ 미감을 등진 새로운 미감의 창안이었을 것이다.

내재적 비평의 또 한 방법은 어떤 사물이나 작품을 둘러싼 ‘조건’을 바탕으로 그것의 가치나 적절성의 정도를 평가하는 것이다. 잠기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아침이라면 정신을 들게 해주는 산뜻하고 자극적인 차가 좋겠지만, 일이 끝나고 돌아와 심신의 긴장을 풀어주는 게 필요한 저녁시간이라면 자극 없고 편안한 차가 더 좋을 것이다. 아파트나 고층빌딩이 빼곡한 도시 한가운데라면 힘차게 솟은 건물이 아름답다 하겠지만, 숲 근처의 주택가라면 그런 건물은 뜬금없이 과시적이고 혼자 돌출되어 아름답다 하기 어렵다.

모든 것들 각각에서 그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여래의 미학이지만, 이처럼 그것은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 더하고 덜함을 말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여기서 미추의 개념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조건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것들로 발산하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많은 미추들이 있는 것이고, 각자의 조건, 각자의 상황에 따라 아름답다 할 것이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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