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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세미나] 티베트

lavabo 2023.01.27 12:26 조회 수 : 241

티베트

여행을 결심하자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티베트에 가려면 여행허가증이 필요했다. 여행허가증은 티베트에 들어가는 외국인의 통행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라는데, 발급하는 데 시간이 일주일이나 걸렸다. **여행사에서 항공권을 사면 허가증을 만들어준다고 해서 여행사에 찾아갔다. 허가증이 나오자마자 가려고 일주일 뒤의 항공권을 예약하려고 했는데 빈 자리가 없었다. 직원은 출발을 일주일 남겨놓고 항공권을 예약하려는 나를 어이없어 하면서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기는 하겠으나 단체관광객이 많아 자리가 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을 경우 허가증이 문제였는데, 인터넷을 뒤져보니 허가증이 꼭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았다. 허가증이 없으면 비행기로는 티베트에 들어갈 수 없지만 기차는 그렇지 않았다. 기차는 표를 살 때만 허가증을 확인하는데 그나마도 확인 안 하는 역이 많고 또 약간의 수수료를 주면 여행사에서 차표 구매를 대행해준다고 했다. 허가증 없이 중국에 가서 기차로 티베트에 들어가기로 했다. 한중 노선 중에 제일 싼 칭따오행 항공권을 샀다. 은행에서 항공료를 송금하고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행사 직원이었는데, 비행기에 자리가 났다고 했다. 그때라도 칭따오행을 취소하고 여행사를 통해 안전하게 티베트에 갈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환불 수수료 4만원이 아깝기도 했지만, 칭따오행이 출발 날짜가 빨랐기 때문이다.

칭따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기내식이 제공됐는데, 미처 차를 마실 새도 없이 칭따오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 공항버스 안에선 업무 관련 통화를 하는 한국말이 끊이지 않았고 차창밖엔 한국어 간판이 즐비했다. 나는 옆자리의 한국여자에게 칭따오역이 어딘지 물었다. 그녀는 잘 모르겠다고 짧고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버스가 고층빌딩 숲을 지나고 있었다. 여자가 가방을 들고 일어서기에 나는 그녀를 따라 나가며 칭따오역에서 내려 달라는 말을 차장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차장에게 몇 마디 하더니 내게는 눈인사도 없이 내렸다. 차장에게 말을 전하긴 한 걸까? 기차역은 보통 시내에 있는데,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도움을 청하려고 버스 안을 둘러봤는데 남아있는 승객은 몇 안 됐고, 누가 한국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차장에게 ‘칭따오 트레인 스테이션’에서 내려 달라고 말해보았지만, 그때마다 차장은 중국어로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내가 내린 곳은 공항버스의 종점인 바닷가 해천대주점(호텔) 앞이었다. 차장은 내가 원망을 늘어놓을 새도 없이 사라졌고, 대신 대기하고 있던 택시기사가 다가왔다. 내가 지도를 꺼내 칭따오역을 가리켰더니 택시기사가 50위엔이라고 썼다. 왜 미터기로 계산하지 않는 거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택시기사에게서 돌아섰다. 그런데 앞은 바다이고 뒤는 호텔이었다. 시내버스정류장은 어디 있는 걸까? 대기실의 차장들에게 물어봤지만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도 내 처지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 하는 꼴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던 택시기사가 30위엔으로 흥정해왔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택시가 선 곳에 기차역은 보이지 않고 거대한 공사장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택시기사는 진작부터 내게 뭔가를 설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택시기사가 지도 위의 기차역을 가리키며 폭발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기차역이 없어졌다는 거야? 나는 택시기사의 답답해하는 표정을 뒤로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역사 전체를 폐쇄하고 공사를 할리는 없다. 나는 어딘가에 있을 역사 입구를 찾아 공사장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railway station...’이라고 쓴 간판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기차역 치고는 규모가 좀 작았는데,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직원이 혼자 창구를 지키고 있었고, 런닝셔츠 차림의 남자가 숙직실로 보이는 곳에서 사발면을 먹고 있었다. 나는 기차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창구 위에 걸린 안내판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건 시간표가 아니라 뭔가의 가격표였다. 나는 창구직원에게 라싸행 기차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그는 내 말을 못 알아들었고 나는 그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 그는 내게 뭔가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다가 핸드폰 사전을 뒤져 railwaystation이란 단어를 찾아 보여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이미 거기가 기차역이 아니라 배송업을 하는 곳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중국에서 기차는 주요한 장거리 교통수단으로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이용하고 당연히 역사규모도 크다. 그런데 동네 우체국 크기의 그곳을 기차역사로 오해할 만큼 중국에 무지한 내가 그들 눈엔 퍽이나 걱정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창구직원이 배달기사에게 사정 얘길 전했고, 배달기사는 꽤 먼 거리를 달려 나를 쓰팡역에 데려다 줬다.

쓰팡역은 밤기차에서 쏟아져 나온 승객들로 붐볐다. 인파를 뚫고 매표구에 ‘라싸’라고 쓴 종이를 보여줬더니 다음날 출발하는 시닝행 표를 끊어줬다. 쓰팡역에서는 칭짱열차가 출발하지 않으니 시닝에서 갈아타란 거였다. 칭짱열차는 티베트의 라싸까지 운행되는 열차로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출발하는데 이 열차들이 모두 시닝을 경유한다.

역사를 나서는데 호텔 전단지를 든 작달막한 아저씨가 따라왔다. 나는 무시하고 걸었지만 그는 계속 따라오면서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머리가 울릴 지경이었다. 겪어보니 대부분의 중국인은 목소리가 컸는데 그래도 그 아저씨를 능가하는 사람은 못 만나봤다. 나는 일부러 다른 길로도 가보고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그는 내가 들어가는 여관마다 따라 들어와 자기가 흥정을 했다. 그렇게 중간수수료를 챙기는 거 같았다. 그를 계속 달고 다닐 엄두가 안나 세 번째 들어간 여관에서 자기로 했다. 30위엔으로 흥정이 끝났을 때 주인할머니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보며 나는 바가지 쓴 줄을 알았다.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 트렁크를 열려고 하는데 자물쇠가 안 열렸다. 트렁크에 자물쇠를 채웠는데 그게 먹통이 된 것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를 사는 게 아니었다. 트렁크를 끌고 밖으로 나가 복도에서 수다 떠는 여자들에게 다가가 손짓발짓으로 상황설명을 했다. 주인할머니가 안에 들어가 펜치를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펜치로는 자물쇠 고리를 끊을 수 없었다. 이어서 젊은 여자가 망치를 가져왔다. 망치로 내리치자 자물쇠가 맥없이 부서졌다.

마침내 길고 긴 하루를 마치고 얇은 합판으로 칸을 나눈 성냥갑 같은 방들 중 하나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합판 너머로 다른 방에서 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옆옆 칸 남자가 들어오자마자 코를 골며 잠들었고 옆 칸 남자는 쉴 새 없이 총칼이 부딪치는 TV 프로를 보면서 야금야금 볼륨을 높였는데, 벽을 두드리자 볼륨이 낮아졌다.

 

시닝

기차 좌석은 딱딱한 의자차(硬坐), 푹신한 의자차(軟坐), 딱딱한 침대차(硬臥), 푹신한 침대차(軟臥)로 나뉜다. 딱딱한 침대차 칸에 들어가니 3층 침대가 마주보고 있었다. 내 자리는 맨 위 칸이었는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떨어질까 겁나는 높이였다. 앉으니 천장에 머리가 닿아서 거기서는 누워 자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복도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카트가 지나갈 때마다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칭따오를 출발해 스무 시간이 넘도록 색깔 있는 거라곤 농가 마당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접시꽃뿐이었다. 마치 꽃이 한 종류 밖에 없는 행성 같았다. 접시꽃 외에는 모든 게 황토색이었다. 차창 밖으로 나무 없는 산과 누런 하천, 누런 흙 벽돌집이 끝없이 이어졌다. 흙 벽돌집들은 땅에서 솟아난 듯 보였고 금방이라도 푹석 주저앉아 흙먼지로 되돌아가 버릴 것 같았다. 산천초목이 온통 누런 흙먼지를 뒤집어쓴 풍경은 볼품없었고, 그토록 오래 지속된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나에겐 한국의 크기를 기준으로 한 공간 감각이 24시간 단위의 시간 감각만큼이나 몸에 배 있다. 그런데 서른 시간 넘게 끝을 안 보여주는 황토지대의 풍경은 밤이 되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처럼 나의 감각을 교란시켰다. 나는 나의 기대를 배반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모습을 유지하는 풍경에 참을성을 잃었다.

기차는 31시간 50분 만에 시닝에 도착했다. 나는 어디든 돌아다니고 싶어 좀이 쑤셨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데다가 늦은 시간이라 여관간판 이외엔 불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기차표를 사러 여행사에 갔다.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 여행사 사장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나를 바꿔줬다. 수화기 저쪽에서 경상도 말씨의 한국인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자기를 김 선생이라고 소개하고는 딱딱한 의자차라면 표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26시간을 앉아 갈 수는 없었다. 김선생이 침대차를 타려면 일주일을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나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환승역으로 생각했던 시닝에서 무려 일주일을 보내게 된 것이다.

시닝역 광장에는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든 남녀군상 조각이 있었다. 그 주위에 서너 명의 사진사가 영업을 했는데 의외로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행인들이 많았다. 오죽 그럴 듯한 게 없으면 저런 조각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겠나 싶어 시닝에서 보내야할 시간이 한심했다.

역사 뒤로 산이 보였다. 기차 차창 밖으로 줄곧 보이던 나무 없는 산이었다. 시간을 보낼 겸 거기 올라가 보기로 했다. 오전에 내린 비로 땅이 질어서 걸음을 옮길 수록 신발 밑창의 진흙이 무거워졌다. 산은 가도 가도 낮은 풀들이 전부였고 바위는 만지면 소금처럼 부서졌다. 아무리 올라가도 앉을 곳도 쉴 곳도 없었다.

다음 날은 타얼쓰 사원에 다녀왔다. 그곳은 가이드 북에서 추천한 시닝의 명소 중 하나다. 시닝의 또 다른 명소는 칭하이 호수다. 그곳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데 철새철이 아니었다. 시닝에서 더는 갈 데가 없었다.

혹시 표를 살 수 있을까 해서 기차역에 갔다. 기차역에 들어서는데 한 손에 열차표를 들고 대합실로 들어가는 백인남자가 보였다. 라싸행 열차가 출발할 시간이었다. 내가 매표소 앞에서 얼쩡대니까 암표상이 다가와 영어로 ‘19일 딱딱한 침대’라고 쓴 수첩을 보여줬다. 내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그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나를 바꿔줬다. 수화기 속의 남자가 영어로 표 값이 600위엔이라고 했다. 226위엔짜리를 600위엔을 부르다니 터무니없는 바가지였다. 흥정을 하려는데 역무원이 다가왔다. 암표를 사는 것도 죄가 되는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는데 역무원이 열차표를 내밀었다. 15분 후에 출발하는 침대차였다.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외치고 여관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여관로비에 들어서니 직원이 괜찮냐며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그에게 슬리핑백과 케이스를 쥐어 주며 접어 넣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널려 있는 짐들을 트렁크에 쓸어 담고 뛰어나가 택시를 잡는데 오토바이가 섰다. 직원이 따라 나와 계속 뭐라고 했다. 나는 맡겨 놓은 보증금이 있단 걸 알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오토바이를 재촉해서 기차역으로 달렸다. 트렁크를 끌고 역사에 들어서자 역무원이 너무 늦었다고 했다. 나는 일분이나 남았는데 무슨 소리냐며 승강장에 들어가려 했으나 입구에 쇠줄이 쳐져 있었다. 역무원이 무전으로 상황을 확인해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유리문 너머로 열차가 출발하고 있었다.

역무원은 상심한 나를 직원 휴게실로 데려갔다. 나는 거기서 영어 잘하는 역무원을 소개받았는데 그녀가 내일 오면 취소되는 표를 구해주겠다고 했다. 여관에 돌아갔더니 카운터의 직원이 내가 흘리고 간 호두 꾸러미와 티셔츠를 내밀었다.

다음날 아침 영어 잘하는 역무원과 같이 매표소에 갔더니 과연 열차표가 있었다. 그런데 매표원이 허가증을 보여 달라는 게 아닌가. 내가 허가증이 없다고 했더니 영어 잘하는 역무원은 허가증을 발급받을 수 있는 여행사의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역사를 나오자마자 김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앉아서라도 가겠으니 가장 빨리 시닝을 떠날 수 있는 열차표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오후에 여행사에서 가서 다다음 날 출발하는 열차표를 받았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 극장에 갔다. 캐리비언의 해적3, 한국영화 최강 로맨스, 제목을 알 수 없는 공포영화가 3류 에로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캐리비언의 해적3의 티켓을 끊었다. 지린내가 진동하는 통로를 지나 상영관으로 들어가니 이미 시작된 영화는 중국어 더빙판이었다. 이 영화가 쏟아 부은 자본에 비해 내러티브가 허술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중국어 더빙판 앞에서 내러티브는 문제가 안됐다. 나는 모래 둔덕을 넘는 배를 보면서 현실의 괴로움을 잊었다.

시닝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려고 안달을 떨었지만, 돌아보면 그곳에서의 시간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매일 아침 여관을 나와 종일 골목을 걸었다. 걷다 보면 구역에 따라 마치 다른 나라처럼 건축 양식이며 사람들의 차림새가 달라졌다. 회족 마을 입구에는 유채꽃이 화려했고 포장 안 된 길에서 검은 옷에 흰 모자를 쓴 노인들이 양을 몰았다. 저층 아파트 단지에는 한족이 살았는데, 현관 앞에 새장을 걸어 놓은 집이 많아서 단지 안이 처음 듣는 새 소리로 가득했고 주민들은 아침 운동 때 개를 대신 새장을 들고 다녔다. 어느 동네나 할 거 없이 골목마다 시장이 섰는데 시장에선 야채, 빵, 고기, 옷 그리고 의치를 팔았다.

나는 골목에만 들어서면 지치도록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는데 무엇보다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문짝들이었다. 손바닥만 한 가게의 문짝, 무허가 주택의 대문, 낡은 아파트의 창고 문 등등. 그것들의 날렵한 형태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그런 허름한 문짝이라면 적당히 뒤틀리기 마련인데 문과 문틀의 이가 딱 맞는 게 그렇게 신통방통할 수 없었다. 거기에 그처럼 감동한 데는 개인적 사연이 작용했다. 여행 전에 서울 집의 문을 새로 해 달았는데 이게 닫아 놔도 혼자 열렸다. 내가 문이 안 닫힌다고 했더니 목수는 그 정도면 잘 닫히는 거라고 했고, 손을 좀 봐 달랬더니 그 이상은 안 되는 거라고 했다. 아쉬운 대로 문을 꽉 닫는 법을 찾기는 했다. 발로 세게 걷어차기. 그런데 여행을 계속하면서 보니 문과 문틀의 이가 잘 맞는 곳은 시닝뿐으로 나머지 지역에서는 ‘메이드인차이나’의 명성을 거듭 확인했다.

칭짱열차

기차 타는 날, 출발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역에 도착했다. 나는 대합실로 들어서다가 뒷걸음질쳤는데, 영어 잘 하는 역무원이 대합실을 지키고 있었다. 허가증 만드는 데 일주일이 걸리니 이틀 만에 기차를 타는 건 허가증 없이 불법으로 표를 샀다는 뜻이었다. 나는 최대한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녀는 곧 일어나 대합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녀를 만날 때 입었던 잠바를 벗어 가방에 쑤셔 넣고 야구모자를 꺼내 눌러썼다. 책을 보는 척하면서 그녀가 나를 못 알아보기를 기도하면서 긴장으로 양 어깨가 아파왔다. 열차는 두 시간 가까이 연착됐고, 나는 그렇게 3시간을 대합실에 앉아 있어야 했다.  

열차에 올랐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시발역인 베이징부터 24시간을 의자에 앉아서 온 승객들은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로 자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통로는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의자 밑에 들어가서 누워 자는 사람도 있었는데 마주보는 의자 사이로 그의 가슴만 보였다. 머리를 기댈 일행이 있거나 창가자리는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나는 기댈 데라곤 의자 등받이밖에 없는 통로 측 자리였는데 등받이가 어떤 자세를 취해도 머리가 고정 안 되는 절묘한 각도여서 잠이 들며 근육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 머리를 떨구며 깜짝 놀라 잠에서 깨게 됐다. 따따블을 주고라도 침대차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빈 좌석이 단 한 개도 없었다.

졸다가 눈을 뜨니 사막이었다. 열차는 평균 해발 4000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칭짱고원을 지나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이번에는 사방이 눈 천지였다. 나는 비좁은 객차에서 식당차로 대피 중이었는데, 설원에 접어들자 승무원들이 일어나 커튼을 쳤다. 나는 눈이 부셨지만 설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또 얼마나 갔을까. 눈이 녹아 거뭇거뭇한 땅이 드러나자마자 가축과 천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도 없고 풀도 없이 바닥에 달라붙은 이끼가 전부인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가혹한 풍경을 아름답다고 하다니. 나는 자꾸만 그곳 어딘가에 홀로 떨어지는 상상에 빠졌고 그것이 현실인 듯 괴로웠다.

의자차의 가격이 싼 이유는 자리를 적게 차지하는 데만 있지 않았다. 승무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침대차를 돌아다니며 대걸레질 했는데, 의자차는 그 긴긴 여정 동안 걸레질을 한번도 안 하고 빗자루질만 몇 번 했다. 시간이 지나며 의자차 바닥엔 그 많은 사람이 삼시 세끼 먹어대는 사발면 국물과 음식물 찌꺼기가 떨어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이 바닥에 쩍쩍 달라붙었다. 시간이 더 지나자 의자차, 침대차 할 것 없이 전 차량의 세면대와 화장실이 자세히 보기 겁나는 모습으로 변했고, 중간통로에는 쓰레기가 천장까지 쌓였다. 열차는 쓰레기로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종착역인 라싸에 도착했다.

스물여섯시간을 의자에 앉아 있은 결과 나의 오랜 지병인 치질이 재발했다. 다른 증상도 있었다. 나는시닝에서부터 오한과 콧물에 시달렸다. 전형적인 고산증 증세인데 그때는 감기인 줄 알았다. 한국에서 가져간 감기약으로 버티다가 기차에서 약이 떨어졌다. 승무원에게 상비약이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가이드북의 필수중국어를 뒤졌다. 한자로 ‘감기약’을 찾았지만, 약(葯)자밖에 없었다. 승무원에게 약(葯)자를 보여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상비약은 없다는 거였다. 라싸에 내려서 감기약을 사려면 한자로 감기를 어떻게 쓰는지 알아야했다. 나는 감기를 표현하는 그림을 그려 승무원에게 보여줬다. 승무원이 핸드폰 중영사전을 뒤지더니 ‘catch cold’라고 쓰며 그게 내가 하려는 얘기가 맞는지 물었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걸 한자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라싸의 약국에서 그걸 보여주고 코감기약을 살 수 있었다.


라싸

라싸에 간 사람은 포탈라궁의 위용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117미터 높이로 산맥처럼 우뚝 선 포탈라궁은 신성한 산 카일라스를 닮았다고 한다. 티베트에 성지 아닌 곳이 없지만 달라이라마의 겨울 궁전이었던 포탈라궁은 성지 중의 성지다. 티베트인들이 평생에 꼭 한번 참배하기를 꿈꾼다는 포탈라궁 앞에는 오체투지하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있었다. 기차에서 보았던 자연 앞에서라면 겸손하게 오체투지 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런 동작이 있을 거 같지 않았다.

포탈라궁은 들어가는 절차가 복잡했다. 입장하려면 방문 전날 예약표를 받아야 하는데 예약표에 입장 시간이 적혀 있다. 포탈라궁에 먼저 다녀온 여행객이 입구에서 날짜만 확인하지 시간은 상관없다고 해서 나는 예약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갔다. 그의 말 대로 입구를 무사 통과했다. 그런데 가파른 언덕을 한참 올랐을 때 두 번째 입구가 기다리고 있었고, 거기서 예약시간을 확인했다. 첫 번째 입구에선 예약표 지참 여부만 확인하고, 두번째 입구에서 예약시간을 따로 확인하다니, 일자리 창출을 위해 일부러 복잡한 절차를 고안해낸 것일까? 나는 ‘중국에선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믿음으로 한참을 실경이 한 끝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시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른 뒤에 매표소가 나왔는데, 나는 그제야 그때까지 표를 안 샀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내 궁 안으로 들어갔다. 좁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동굴 같은 방들이 이어졌다. 방마다 화려한 금은보화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야크버터램프가 보물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보물 동굴 같았다. 어두운 복도는 햇빛이 쏟아지는 옥상과 통했고, 금빛 지붕들에 둘러싸인 옥상은 다시 어두운 복도로 연결됐다. 짙은 야크버터냄새를 맡으며 빛과 어둠의 통로를 번갈아 지나노라니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수천개의 방을 지나 마지막 방을 빠져나오자 눈을 찌르는 햇빛이 쏟아졌다. 방문객들은 해발 3650미터의 햇빛에 노출되자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우산을 펴자 한 남자가 내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고, 우리는 소나기 같은 햇빛을 피해 뛰듯이 언덕을 내려갔다.

저녁에 한국식당에 갔다가 한국인들과 합석했다. 그 중에 티베트인처럼 얼굴이 검게 그을린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하는 중인데 기차로 14시간 걸리는 거얼무-라싸를 자전거로 12일 걸려서 왔다고 했다. 내가 창밖으로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에 떨었던 그 구간을 그는 자전거로 지나온 것이다. 그가 거얼무를 지날 때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초원을 지나는데 천막에서 집채만 한 개 두 마리가 달려 나왔다. 개들은 짖지도 않은 채 야크 떼를 몰듯 양쪽에서 그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초원에서 제일 무서운 건 첫째가 유목민이고 둘째가 유목견이라고 한다. 어떤 개는 지나는 트럭에 달려들어 바퀴를 물고 아래턱이 돌아가도록 놓지 않았다고 하니 그 사나움을 짐작할 수 있다. 개들에게 물리면 끝장이었다. 걷는 것만으로 숨이 차는 고도였지만 개들보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안 됐다. 1킬로에 걸쳐 목숨을 건 레이스가 벌어졌는데, 개들이 먼저 나가떨어졌다. 개들과 일이백미터 쯤 떨어져 자전거를 멈추고 숨을 몰아쉬는데 목구멍에서 금속 가르는 소리가 났다. 그는 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지리산에서 7년을 텐트 치고 살았고 귀신도 안 무서웠다. 그런데 고작 개가 무서워 혼비백산한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다. 이야기 끝에 그는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바라본 풍경이 여전히 아름답더라고 덧붙였다.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걸 아름답다고 느끼는 법이다.

남초호수

한국식당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이 여행사에서 1박 2일짜리 남초호수투어를 예약했다. 그런데 다음날 약속된 시간에 투어버스정류장에 갔을 때 우리 자리는 없었다. 여행사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미안하단 말도 없이 두 명은 자리가 있으니 지금 타고 가고 나머지 한 명은 내일 가라고 했다. 그나마 있다는 자리도 1박 2일이 아니라 당일치기였다. 씩씩거리며 여행사 앞에 가서 문 열 때까지 기다렸다 환불을 받았다. 그러느라 한 나절을 소모했지만, 몇 차례 중국여행 경험이 있다는 일행들은 환불받은 것만 다행스러워했다.

일행과 헤어져 혼자 남초호수행 봉고차에 올랐다. 봉고차는 4시간을 달려 호숫가 마을에 도착했다. 해발 4718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라는 남초호수의 하늘은 맑고 시야는 선명했다. 이전에 경험해본 적 없는 선명도였고 찌르듯 눈이 부셨다. 숙소를 정하고 선글라스와 모자와 우산으로 중무장한 뒤 밖으로 나섰다. 관광객들이 호수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언덕을 올랐다. 중턱에 이르자 눈앞에 소문으로만 듣던 푸른색이 펼쳐졌다. 호숫가에 우산을 파라솔 삼아 쓰고 누웠다. 종아리에 닿는 햇볕이 따뜻했다. 기차 차창 밖으로 침대에 누운 것처럼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유목민들을 보며 의아했는데, 바닥에 누워 보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편안함 속에서 잠들었다가, 기억나지 않는 꿈에서 깨어났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호수는 잔잔했고 새소리 풀벌레 소리 하나 없었다.

걷다 보니 숙소가 있는 마을이었다. 호숫가에서 여자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근처에 주저앉아 빨래하는 걸 구경하는데 얼굴에 때가 덕지덕지 낀 남자아이 셋이 다가왔다. 아이들은 목걸이를 몇 개씩 걸고 있었는데, 내게 그걸 팔고 싶어 했다. 나는 안 산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놀거리를 찾았다. 한 명이 원뿔 장식을 주워 만지작거리다 그걸 자기 성기에 가까이 대는 것을 시작으로 아이들이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거기에 손가락을 넣다 뺐다 하며 킬킬거렸다. 큰 아이는 빨래하는 여자들이 못 보게 상의로 손을 가린 채였다. 나는 그 아이들이 지긋지긋해져서 저만치 있는 여자아이들에게 갔다.

열두어 살쯤 된 여자아이 셋이 세수를 하고 나서 서로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우리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서로의 몸과 소지품을 만지며 반응을 살피곤 경계를 풀었다. 세숫비누상자에 깨알같이 박힌 한글이 눈에 띄었고 내가 그것을 가리키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헬로’ 라고 말했고, 내가 ‘헬로’로 시작되는 영어동요를 부르자 아이들은 따라 부르고 싶어 했다. 치장을 마친 아이들이 뺨에 생긴 검은 화상자국에 울상을 지으며 자외선 차단제를 발랐다. 내가 우산을 폈더니 아이들이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헬로 헬로 헬로 하우아유.” 우리는 조그만 우산 그림자 속에서 같이 영어동요를 불렀다. 여자들이 빨래를 너는 동안 아이들은 세면가방을 챙겨 일어섰고 우리는 손을 잡고 숙소로 향했다.

어두워지며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온 마을 개들이 릴레이라도 하듯 번갈아 짖어댔다. 컨테이너 숙소의 문을 열자 고양이가 먼저 들어가 침대를 차지했다. 누워 자는 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나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난방이 안 되는 방은 차가웠고, 발전기 소음으로 컨테이너가 진동했으며 발전기가 꺼지기 전에는 눈을 찌르는 백열등을 끌 수도 없었다. 밤 11시에 발전기가 멈추고 사방이 어두워지는 걸 느끼며 겨우 잠이 들었다.

새벽에 가슴이 답답해 잠이 깼다. 이불을 들치고 일어나는 동작만으로 숨이 찼다.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엔 별이 가득했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한참을 문 밖에 앉아있었는데 무섭지 않았다. 나무 그림자가 없어서일까? 개 짖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주위에는 그림 속처럼 온화한 어둠이 가득했다.

다음 날 아침에 나가보니 밤새 울부짖던 개들이 여기 저기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수도시설이 없어서 가져간 생수로 이만 닦고 일찌감치 봉고차에 올라 출발을 기다렸다. 다음 행선지가 고민됐다. 여기까지 왔는데 에베레스트에 가야 할까? 그러나 민둥산도 모자라 만년설이라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추운 방에서 자는 것도, 씻을 물을 걱정해야 하는 것도, 해발 7000미터 높이에서 숨을 헐떡대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나는 티베트를 떠나기로 했다.

시안

나무가 그리웠다. 라싸에 돌아오자마자 중국의 알프스라는 청뚜행 비행기표를 알아봤지만 빈자리는 없었다. 병마용이 있는 시안행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무작정 기차역에 갔다. 그런데 내 앞에 줄을 선 아저씨가 다음날 출발하는 시안행 표를 환불하러 온 게 아닌가.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했다.

다음 날 아침 기차에 올랐다. 내 자리는 침대차 아래 칸이었다. 긴 의자에 앉고 싶을 때 앉고 눕고 싶을 때 누울 수 있고, 창가자리에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테이블을 내 공간으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테이블에 물건을 잔뜩 올려놓고 의자에도 잡동사니를 늘어놨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도 정성껏 닦았다. 그런데 식당차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내 자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침대 위칸의 여자가 친구들을 데려다 우리 객실 전체를 차지하고 카드놀이를 하는 거였다. 나를 보더니 한 명이 일어나 자리를 내줬다. 나는 카드치는 사람들 사이에 낑겨 앉았다. 앞자리의 할머니도 자기 자리를 내준 채 앉아서 졸고 있었다. 카드놀이는 수십 판씩 계속됐고 나의 빼앗긴 권리는 회복될 기미가 안 보였다. 할머니가 상황을 종료시켜 주길 바랬지만, 할머니는 가끔씩 졸다가 깨서 천사 같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할머니가 카드놀이 하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2층 침대로 올라가 잠들자 나는 마음을 비우기로 하고 복도 의자에 나가 앉았다. 그러나 마음이 비우기로 한다고 비워지는 건 아니다. 나는 복도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카트가 지나갈 때마다 일어서길 반복하다가 짜증이 치밀어 일행 중 한 명에게 다가가 “언제까지 카드를 칠거냐?”고 영어로 물었다. 내 말을 못 알아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빙긋 웃으며 영어로 “내가 물어봐 줄게.” 하더니 그들에게 말을 전했다. 그러자 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아니라......” 내가 당황해서 완곡하게 표현할 말을 찾는 동안 상황은 정말 그게 아닌 것으로 되어버렸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아 카드를 치고 있었다. 카드놀이는 기차가 시안에 도착한 밤 8시까지 계속됐다.

시안은 수와 당의 수도였다. 시안을 본떠 신라의 수도 경주를 세웠다는데, 오래된 성벽과 종루가 백화점과 시장에 어지럽게 둘러싸인 시안은 경주보다 서울 구도심과 비슷했다.

진시황릉을 지키는 병마용은 시안 근교에 있었다. 월드컵 경기장만한 지하공간에 7천명의 테라코타 군인들이 서있었다. 나는 고대의 거대 기념물과 마주할 때마다 그 엄청난 규모에 압도됨과 동시에 그만한 규모를 가능케 한 당시의 신념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떠올리며 복잡한 감상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테라코타 군인들을 보면서 과거의 신념을 무지몽매한 것으로 치부하고 당시 사람들을 희생을 강요당한 수동적 존재로 여기는 건 지금의 나를 표준삼은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사후세계는 실재했고 그들은 진지한 자발성으로 무덤을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토용의 아름다움이 그 증거였다. 나는 군인들의 얼굴을 한 명씩 한 명씩 들여다보며 죽은 뒤에도 살고자 한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걸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병마용을 보고 나자 진시황릉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발굴이 안 된 진시황릉은 덩그러니 고분이 다였다. 작은 야산 크기의 고분엔 떼도 안 입힌 채 키 작은 나무를 줄지어 심어 놓았는데, 볼품없이 듬성듬성한 나무들은 변변한 그림자 한 조각을 못 만들었다. 나는 그 조잡함에 마음이 상해 서둘러 고분을 내려왔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고분 어딘가에는 진주로 장식된 천장과 금은 조각상들 그리고 수은이 흐르는 호수가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내 눈으로 보고 싶은 조바심에 고통스러웠다.

나는 이번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았는데 핑야오와 다퉁을 거쳐 베이찡까지 갈 수도 있고 곧장 칭따오로 가 비행기를 탈수도 있었다. 나는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것 같았다.

기차 매표창구 앞에서 한 시간을 더위와 새치기에 시달린 끝에 겨우 내 차례가 되었다. 매표원에게 다음날 출발하는 칭따오행 좌석이 있는지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모레 좌석을 물으니, 자기 창구는 오늘 내일 양일 표만 취급하니 다른 창구에 알아보라고 했다. 일주일치 표를 파는 창구 앞에서 다시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칭따오행은 모레도 없고 글피도 없고 계속 없다고 했다. 매표원이 무뚝뚝하게 고개만 흔드니까 뒤에 서있던 아가씨가 나서서 통역을 해줬다. 매표원이 칭따오에 있는 역이라며 창커우행 표를 권했다.

나는 창커우가 칭따오의 영등포역쯤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칭따오 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창커우를 찾을 수 없었다. 여관직원에게 물으니 칭따오와 창커우는 별개의 도시인 거 같다고 했다. 오후 내내 시들해져 있다가 해결해야할 과제를 만나자 생기가 돌고 힘이 솟았다. 여러 창구를 돌아다닌 끝에 창커우가 칭따오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의 도시라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창커우를 거쳐 칭따오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시안의 마지막 밤엔 모기가 극성을 부렸다. 해가 뜨는 걸 보고 잠이 들었는데 너무 충분히 잔 거 같은 느낌에 화들짝 잠이 깨 시계를 보니 10시 50분이었다. 10시 16분 기차를 놓친 것이다. 차표는 환불이 안 됐다. 다시 칭따오가 속한 산둥성의 성도 지난까지 가는 차표를 끊었다.

칭따오

기차는 지나는 모든 역에 정차면서 17시간 만에 지난에 도착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칭따오 가는 버스를 탔다. 고속도로에는 사고가 많았다. 트럭이 가드레일을 뚫고 뒤집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트럭은 싣고 가던 철근을 쏟고 멈춰서 있기도 했다. 거울을 통해 버스기사를 봤는데 기사의 눈꺼풀이 자꾸만 감기고 있었다. 깜빡 졸다가 고개를 떨구기까지 했다. 간담이 서늘했다. 기사 옆에 앉아있던 차장에게 알렸더니, 차장이 기사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차장의 명랑한 수다는 운전수가 그만하라는 수신호를 줄 때까지 계속됐고, 우리는 무사히 칭따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출발 사흘 전까지 서울 항공사에 예약확인 전화를 해야 하는데, 비행기 날짜가 하루 앞이었다. 지난에서부터 전화카드를 사서 공중전화마다 돌아다니며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안 됐다. 숙소를 정한 뒤 여관주인에게 가이드북에 나온 중국어를 총동원해 국제전화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여관주인이 10여분을 걸어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는데, 도착한 곳은 전화국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가진 전화카드는 국내용이었다. 국제전화카드를 사서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안내원은 출발 사흘 전에는 예약확인을 해야 하는데 예약확인이 늦어 다음날은 빈자리가 없다면서, 좌석확인을 해보고 연락을 줄 테니 이메일, 팩스 또는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는 내가 전화카드로 인한 그간의 짜증을 그녀에게 쏟아 내려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카드를 사서 전화를 걸었다. 안내원이 굳은 음성으로 다음날 항공권이 예약됐다고 알려줬다.

공항버스 정류장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 장개석이 숨어있었다는 독일식 건물 화스러우에 갔다. 살고 싶은 집이었으나 입장료를 내고 구경할만 하지는 않았다. 근처 공원에서 거기까지 간 보람을 찾을 수 있었는데, 나는 제 무게를 못 이겨 도로까지 가지를 늘어뜨린 검푸른 침엽수림을 따라 걸으며 그 검푸른 녹색에 맘껏 황홀했다. 공원을 나와 해변도로를 지났다. 해변은 한국의 동해와 비슷했는데, 바위가 황토색이었다. 나는 그곳까지 따라온 황토색에 중국음식을 먹었을 때처럼 속이 매슥거렸다.

다음날 아침 해천대주점을 출발한 공항버스가 바다에서 멀어지더니 한국간판이 즐비한 외곽지역을 지났다. 버스기사는 속도가 느린 앞차에 욕설을 중얼거렸고 끼어들려는 차에 경적을 울렸다. 익숙한 운전 매너라고 생각하며 백미러를 통해 보니 운전기사는 유난히 한국인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복잡한 상념과 일과 관련된 불편한 감정들이 진부한 TV 프로그램처럼 머릿속에 지나갔다. 그 도로에서 나는 이미 서울에 있었다.

서울

짧은 비행 끝에 김포공항에 내렸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의 서울 하늘은 청명했고, 가로수 잎사귀는 파랗게 무성했으며, 색깔이 많은 거리는 깨끗하고 발랄했다. 서울이 이렇게 예뻤던가? 여행 내내 찾던 풍경이 거기에 있었다. 낯선 곳을 찾아 떠나서는 정작 낯선 것과 마주치자 달아나는 데만 급급했구나 하고 나는 그제야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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