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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세미나] 축도

Ming 2022.11.17 23:42 조회 수 : 1984

 그 애들은 하얀 접시에 담겨왔다.  5월의 맑은 날, 깨알만큼 작은 아이들을 받아 드는 손이 긴장한다. 엷은 미색의 생명들이 연약해 보여서 가까워진 숨소리를 작게 골라본다. 한참을 바라본 후에야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알들을 쓸어본다. 접촉이란 그런 것인지, 잠깐 스쳤을 뿐인데도 마음 한 구석이 간질간질하다.

 이 조그만 아이들은 곧 우윳빛 몸통과 자잘한 발들을 지니게 될 누에의 알이다. 나는 전해들은 대로, 얇은 거즈를 물에 적셔 알들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둔다. 집안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을 고르고 골라 양지바른 곳에 접시를 놓아둔다. 완고한 침묵의 세계, 부동의 알들이 과연 깨어나긴 하는 걸까. 큰소리라도 들리면 알 속 생명이 놀랄까 조바심으로 보낸 열흘이었다.

 새까만 애벌레 한 마리가 접시 위를 꼬물거린다.  2밀리 정도 길이에 검게 말라 실처럼 가느다란 아이, 알에서 갓 나온 이 시기의 애벌레는 개미누에라 불리지만, 모습 어디에도 개미다운 강단은 보이질 않는다. 이 가느다란 숨결 하나 내어놓기 위해 그 동안 알 속 세상이 얼마나 분주했을지… 너무 가냘퍼서 위태로운 경이. 나는 이 작은 생명이 불안해서 아이 시절 들었던 축도를 더듬어본다. 극진하신 사랑과, 날마다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역사가…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대기해 두던 뽕잎을 잘라 방금 깨어난 아이 옆에 살짝 내려놓는다.

 어느덧 이파리를 가득 채우던 애벌레들이 또 며칠 후엔 까맣게 말라 죽어간다. 무게도 없이 죽어가는 아이들이 슬퍼서 이파리에 곱게 싸서 화단에 묻어준다. 봉분조차 무거울 듯 하여 가벼운 이파리 한 장을 골라 얹어둔다. 죽어가는 이유를 모르니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삶과 가까운, 더 싱싱한 잎을 찾아야 한다. 신선한 뽕잎을 새로 주문하고, 배송을 기다릴 수 없어 주변에 수소문을 해 뽕나무가 심어져 있다는 인근 초등학교를 알아낸다. 연고도 없는 학교에 수위아저씨라도 닥칠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방금 따낸 파릇한 이파리 여러 장을 봉투 안에 욱여 넣었다.

 물을 여러 번 갈아가며 혹시 모를 잎의 농약을 제거한다. 물기를 없애고 이파리를 전보다 더 곱게 썰어 수시로 새잎으로 바꿔준다. 우리를 승리케 하는 역사가 날마다 함께 하기를…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가 수백 중에 예순 남짓, 어느새 2센티 가량 자란 애벌레들은 제법 뿌연 마디를 갖춰간다. 웬만큼 자랐으니 더는 죽지 않겠지 마음을 놓으면 2령에서 3령으로, 3령에서 4령으로 허물을 벗을 때마다 후드득 죽어가는 것들이 있다. 긴장을 푼 탓인 것만 같아 냉장 칸에 수북한 뽕잎을 전부 내다 버리고 다시 인근의 학교로 걸음을 옮긴다. 나는 이 애들의 생명을 주관한다. 한 마리 한 마리를 새로운 수조로 옮겨가며 까만 변을 치워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내가 집중을 놓는 순간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검지 손가락만큼 피둥한 애벌레 열이 살아남았다. 살아있는 것들은 감각하고 변화하며 시간을 누빈다.  5령이 된 아이들은 생애 가장 화려한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시간을 누리듯 뽕잎들 사이를 누비며 아작아작 탐욕스레 잎을 갉아대는 소리가 흡족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파리 위를 기어 다니기만 하던 아이들 중에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놈이 보인다. 수평이동만 하는 아이들인데 빳빳이 몸을 세우고 나와 눈을 마주하는 한 마리가 있다. 코브라마냥 바짝 치켜 든 몸통 아래 분주한 발들이 허공에서 바르작댄다. 그 다음 날은 한 놈이 더 가세해 수직 운동을 벌인다. 미적거리며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아이들 사이로 두 놈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 한다. 온 몸을 곧추세우고도 빠르게 기는 방법을 알고있다.

 하나 둘 셋... 또 다음날은 열 마리 중 하나가 빈다. 몸을 세우고 춤을 추고 있는 놈이 한 마리뿐인 걸 보면 사라진 놈은 어제 감히 나와 눈을 마주하던 그 놈일 것이다. 어디로 간 걸까. 수조 뚜껑 사이로 나갔나 싶어 주변을 살펴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뽕잎만 먹고 사는 이 것들이 서로 잡아먹기도 하는 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겁이 난다.

 사라진 한 마리는 어쩜 그리 빨리 움직였는지 몇 미터 밖 거실 중앙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 놈은 날래기만 한 게 아니다. 목적이라도 있는 양 방향을 갖고 몸을 밀어붙이며 바닥을 기어왔다. 나는 자아라도 가진 듯 무리를 벗어난 저 아이가 무서우면서도 이렇게 다시 찾게 되어 마음이 놓인다. 무리로 돌려보내기 위해 핀셋과 이파리 한 장을 들고 와 가까이에서 살펴본다. 미동도 없는 그 것을 들여다보자니 옆구리가 툭 터져 있다. 본래의 체액인지 몸이 곯은 것인지, 기역자로 꺾인 옆구리에 푸르뎅뎅한 액체를 게워낸 채 죽어있다. 희멀건 길이 나동그라진 몸을 따라 꾸덕하게 말라있다.

 그날 밤에는 꿈을 꾸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애벌레들은 몸에 피가 도는 듯한 선홍색 몸뚱이로 나타났다. 그것들은 어딘지도 모를 허공에서 툭툭 내게로 힘차게 낙하해 발 밑을 기어 다녔다. 발로 짓이기면 붉은 피가 베어나올 것 같고, 나를 향해 피 같은 비명이라도 질러댈 것만 같다. 나는 미동이 없던 그 아이처럼 몸을 기역자로 꺾고, 암전 속 붉은 벌레들의 세상에서 숨을 아껴가며 쉬어야 했다. 다행히도 내 꿈에 갑자기 등장한 아버지는 몸에 좋은 놈들이라며 벌레들을 마구 잡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암막이 걷히고 꿈에서 깨어난 뒤로도 나는 여러 번 안도했다.

누에농병. 바이러스 입자가 혈구, 진피세포의 핵을 침입하는 전염병. 병징: 누에가 식욕을 잃고 누에자리를 돌아다니며, 누에의 마디가 굵어지고 혈액의 색이 변하며, 피부가 얇아지고 터진 피부에서 고름이 흘러 나온다.

 검색을 통해 병명을 얻어냈다. 바이러스성 전염병. 결단은 금세 이루어진다. 수조바닥에 갇히길 거부하고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있는 한 놈을 수조에서 끄집어내어 휴지로 둘둘 말아 처리한다. 불현듯 수조 안 생명들이 모조리 고개를 쳐들고 빤히 눈을 맞춰올 것만 같다. 어젯밤 꿈 속의 불쾌감을 다독이며 바닥을 묵묵히 기고 있는 애벌레들을 바라본다. 이 애들의 고요한 일과와 눈앞에 다가온 변화를 그려본다. 내내 보초를 서듯 지켜봤지만 더 이상의 일탈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윳빛이던 피부가 노란 젤리처럼 반들거린다. 찐득하게 익어가던 애벌레의 입에서 드디어 투명한 실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이다. 나는 하얗고 동그마한 고치집 여덟 개가 지어지는 과정을 지치지도 않고 지켜보았다. 이 애들이 알의 모양으로 왔을 때보다 조금 더 과감히 둥근 고치 하나를 쓰다듬어본다.

 2주가 지나면서 고치 구석이 검게 변하더니 어느 날은 그 자리가 뻥 뚫려 있다. 빠르게 수조 속을 훑어본다. 있다. 다갈색의 나방 한 마리가 빗살 더듬이 아래로 까만 눈을 하고 날개를 움찔거린다.  “안녕? 니가 젤 맏이야. 축하해!” 꼬마나방에게 반가운 인사를 한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고치에 갇힌 채 말라 죽은 두 마리와 더디게 집을 지은 한 마리를 제외하고 다섯 마리의 나방이 차례로 깨어났다. 다섯 중 한 마리는 한쪽 날개가 없다. 날지 못 하는 반쪽 날개를 파닥이는 모양에 고치를 쓰다듬던 날의 내가 겹쳐진다. 너는 어쩌면 내 손이 닿아 망가진 아인 아닌지, 나의 성심은 승리와는 닿아있지 않은 듯 하다.

 나방들은 몇 번 날아보지도 않고 이내 꼬리를 맞대더니 짝짓기에 돌입한다. 두 쌍의 나방이 짝짓기를 하는 동안 남은 한 마리가 주변을 맴돈다. 혼자 남은 나방은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파닥거리며 수조 안을 사정 없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수조 벽에 부딪쳐오는 날갯짓 소리가 제법 크게 거슬린다. 미색가루들이 날개에서 연신 뿌옇게 흩어져 내린다. 계속 저러다가는 날개가 다 바스러질 것만 같다.

 이 애들은 입이 없다. 입이 퇴화되어 물 한 모금조차 머금을 수 없다. 먹을 수도, 게워낼 수도, 소리를 질러낼 수도 없는 나방으로서의 유일한 일, 5령까지 살아남아 고치 속에 웅숭그리고 기다려온 과업, 종의 보존이다. 나는 저 미친 듯한 날갯짓이 참을 수 없어진다. 이렇게 아무 기회도 없이 죽으려고 숱한 죽음들 속에 끝까지 살아남은 건 아니어야 한다. 날갯짓을 대신해 이번엔 내가 미친 듯 수조를 흔들어댄다. 두 쌍 중 한 마리라도, 잠시라도 제발 떨어져보라고 아래위로 세차게 흔들어댄다. 나방들은 정신 없이 벽에 부딪치면서도 필사적으로 꼬리를 대고 있다. 날개가 부서져가는 저 애에게도 기회란 걸 주고 싶었지만 내 의지는 축복과 닿아있지 않다. 마지막까지 날개를 부딪다 죽은 그것의 몸통에 마른 잎맥이 너덜거렸다.

 짝짓기를 끝낸 두 마리 암컷이 이내 알을 낳기 시작한다. 한 마리는 수조의 여기저기에 빈 공간을 채우 듯 빼곡히 알을 낳고, 날지 못 하는 반쪽 날개는 탑을 쌓듯 꾸역꾸역 한 자리에 알을 낳아 놓는다. 그리고는 끝이 났다. 끝이었다. 짝짓기의 임무를 마친 수컷들은 암컷이 알을 낳는 동안 생을 다했다. 뒤늦게 고치를 뚫은 한 마리만 유일하게 남아 시체들 위를 정신 없이 날다가 날개가 앙상한 채로 죽어 버렸다.

 수조 안 풍경을 바라보다 새로 태어난 노란 알들을 만져본다. 두 달 전엔 스치기도 안타깝던 알들을 손으로 꼬옥 눌러본다. 단단하다. 너무 단단해서 이번엔 손톱을 눕혀 뭉개본다. 손톱에 둔탁한 통증이 전해지는데도 저것들은 형태조차 흐트러지지 않는다. 꿈쩍도 하질 않는다. 나는 철갑에 싸인 저것들의 생의 의지가 끔찍하다. 이것들이 돌처럼 단단한 알을 뚫고 나오고, 하염없는 죽음들 사이에서도 잎을 갉아대고, 조롱이라도 하듯 누런 길을 만들어내고, 보란 듯이 날개가 삭을 때까지 종족을 염원하고, 기어코 같은 삶을 낳아놓고야 죽는 이 모든 행태가 소름 끼친다.

 사는 일도 죽는 일도 소름이 끼친다. 나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수조 안 단단히 붙은 알들을 긁어내기 시작한다. 하나도 새어나가지 않게 꼼꼼히 긁어 싸서 아파트 바깥 쓰레기통에 내어버린다. 기억이라도 날까 수조를 재활용 쓰레기에 집어 던지고 돌아선다. 바람은 여전히 맑고 시간은 수난처럼 숨을 쉬고 풍경은 살아있는 것들로 빼곡하다. 나는 입이 퇴화되어 말을 전달하는 방법을 모르니 오늘의 축도는 비명처럼 질러야겠다.

  - 살아있는 것들아

    삶을 간구하지 말아라

    축복 없는 곳에 저주 없나니

    살아있는 것들에게 축복 없어라

    축복 없어라

    축복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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