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은 마음
작은 읍내에도 비교적 큰 마트가 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빵들이 있다. 어느 날부터 문도 열리지 않는 이른 시간에 그곳에 길게 줄이 늘어선 것이 보였다. 그 줄은 점점 더 길어졌고 연령대도 다양했다. 초등학생부터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시간도 점점 앞으로 당겨지고 있었다. 그 줄의 정체를 안 것은 센터 아이들 몇 명이 토요일 새벽에 그 줄에서 발견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포켓몬 빵 때문이었다. 포켓몬 빵 속에 있는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 늦잠을 포기하고 그 긴 줄 속에서 두 시간 세 시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일을 매일 빵이 나오는 날마다 했다. 왜냐하면 한 명이 하루에 살 수 있는 빵의 개수를 3개로 제한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어르신들은 그것을 사서 도시에 있는 손자와 손녀들에게 택배로 보낸다고 한다. 무더위와 장마에도 그 뜨거운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SPC계열 에스피엘 제빵공장에서 샌드위치 소스를 만들던 20대 젊은 여성노동자가 교반기에 끼여 숨진 채 발견된 것은, 그 열기가 가라앉지 않고 있던 지난 10월 15일 오전 6시 15분의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여성노동자를 숨지게 한 기계를 옆에 두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전국 마트에 줄을 서서 빵을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들과 대형 제과점에 새벽이면 어김없이 진열되어야 할 샌드위치와 빵 때문이었다.
자본가는 축적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포켓몬 빵을 생산하는 그 회사는 여성노동자의 죽음을, 포켓몬 빵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긴 줄을 선 이들에게 돌리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노동자들에게 야간근무를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입과 혀를 달콤하게 하는 선행을 베풀었는가. 노동자들의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배달되도록 하였지 않은가. 정말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들에게 불매운동은 믿기 어려운 현실일 것이다. 어쩌면 배신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것은 포켓몬 빵에 그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 날에도 새벽부터 긴 줄을 서서 포켓몬 빵을 사기 위해 혹은 제과점 샌드 위치를 집어들던 사람들은, 자신의 이런 구매행동이 보이지는 않지만 빵을 빚는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고용한 자본가들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음은 물론이었다. 그게 산산조각이 났다. 구매자들은 자신에게 당도할 빵에 넣을 소스를 만들다가 정작 혼합기에 끼여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도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시간과 장소는 다르지만 그림자노동을 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성노동자가 교대가 끝났을 때 비누거품을 내며 손을 깨끗이 씻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포켓몬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던 그 긴 행렬은 이제 끝이 났다. 날이 추워져서가 아니라 그 여성노동자를 어떻게 해서든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그 마음이 멈추게 한 것이다. 자본가의 축적이 자본가 자신을 착취한 결과나 절제의 미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드러났다. 일을 마친 누구나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은 그 마음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이다. 말의 힘은 뜻밖에도 크다.
SPC 제빵공장의 여성노동자 산재사건을 정당화하는 자본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좋은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북클럽자본]10권에서 축적된 자본을 정당화하는 자본가의 '절욕설'을 떠올렸습니다.
일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잉여가치를 자본가의 절욕에 대한 보상'이라고 했는데, 이는 근대적 자본가들이 '축적된 자본을 자신의 절제에 대한 대가'라는 주장에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고전적 자본가는 직접 생산노동에 나서기도 하고 개인적 소비를 '절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데 반해, 근대적 자본가는 자본투자 자체를 '절욕'이라며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합니다. 농업노동자가 씨앗을 심을 수 있었던 것은, 자본가가 그 씨앗을 다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입니다. 그리고 증기기관, 면화, 철도, 비료 등등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제공하는 생산수단 역시, 자본가가 모두 탕진해버릴 수도 있었던 것을 생산과정에 투입했다는 거지요. 이러한 절욕에 대한 보상이 잉여가치라는 거지요.
자본가의 '절제설'은 노동자의 노동일 단축을 요구하는 투쟁이 본격화된 시기에 부르주아들의 계급투쟁의 무기였습니다. 노동자의 노동'이 아니라 '자본가의 절제'가 자본축적을 가능케 했다, 자본축적은 노동자를 착취한 게 아니라, 자본가 자신을 착취한 결과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자본가의 돈을 벌기 위한 투자를 절제라고 부르고, 투자를 스스로에 대한 착취라고 부르는 자본가에 대해, 맑스는 엄숙한 태도로 말합니다. "단순한 이류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본가를 순교와 유혹에서 해방해야 함이 명백하다."
저자 역시 맑스를 따라 이렇게 말합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싶은 욕망을 참으면서, 자본을 축적하는 이 고행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아무리 인류 전체를 위한 희생이라 해도 이러면 안됩니다. 자본가를 그 고난에서 해방해주어야 마땅하지요.... 자본가가 고행자의 삶을 살지 않아도, 사회의 재생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자본가가 없어도, 자본축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한 사회의 성원들이 자신들을 유지하고 생산을 확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자본가 여러분, 이제 해방입니다. 여러분은 더이상 인류를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자본가를 그만두어도 됩니다!" [북클럽자본] 10권 4장 ‘축적의 길은 고행의 길, 자본가는 수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