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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2-0117] 이진경의 불교를 미학하다  /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ttp://www.beopbo.com/news/articleList.html?view_type=sm&sc_serial_code=SRN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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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의 나라 저편의 신과 바위 속에 숨은 부처 : 내재성의 미학

: 불교엔 신적 인물 넘치지만 어떤 초월성도 없어

고딕성당의 수직성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신이 존재함을 상징
불교에선 크고 작은 대로 모든 자연물이 잠재적 부처이자 신
돌과 보살상 섞이며 내재한 자비로운 힘 웃으면서 배어나와

2022-0708_불교를 미학하다2.jpg고딕성당과 바이욘 사원은 유사한 규모의 축조물이지만 고딕성당이 그 크기를 통해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밀쳐낸다면, 바이욘은 멀리 있는 이들마저 전체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모호한 형태의 비의성 속으로 끌어당긴다. 캄보디아 바이욘 사원, 프랑스 랭스성당.

 

서양 예술작품 가운데 초월성의 미학을 가장 극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고딕성당이다. 생드니 성당의 주임신부였던 쉬제(Suger) 신부는 성당의 와해된 제단소(apse) 부분을 복구하면서 이전과 다른 대대적 혁신을 시도한다. 작은 창에 요새처럼 두꺼운 벽이 인상적이던 이전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과 달리 뾰족아치의 넓고 큰 창들을 내 밝은 빛을 성당 내부로 끌어들였다. 그 뒤에는 창문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붙여 내부는 밝고 화려한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후 로마네스크 성당의 시대는 가고, 큰 창으로 가득한 벽과 두꺼운 기둥을 옆에서 떠받치며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늑골(rib)을 이용해 높디높은 건축물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미학적 초월성이란 하늘을 향해 상승하는 수직적 높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초월성이란 그처럼 오르고 올라도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성과 가까이 있다. 고딕성당의 수직성은 신이란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함을 증거하는 건축학적 귀류법이었다. 성당 내부에서도 그렇다. 회중석 앞에 섰을 때, 시선은 촘촘히 중첩되며 수직 상승하는 기둥과 늑골들을 따라 천장으로 올라간다. 고개를 젖혀 높이 하늘을 보지만, 신은 시선이 도달할 수 없는 저편에 있다. 초월자란 그처럼 신의 나라 안에서도 가 닿을 수 없는 바깥, 우리가 사는 차안 세계 저편에 있다.

물론 그 초월자의 존재를 증거하고, 그 초월자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이들이 있다. 스테인드 글라스의 화려한 창문도 그들의 형상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내가 그 창문의 인물들을 볼 때조차, 나는 ‘보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이다. 그 인물들의 형상을 투과하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저 바깥에서 나를 보는 초월자의 시선으로 내게 온다. 나는 볼 수 없는 누군가가 나를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 수직성의 건축학과 비대칭적 빛의 배치가 만드는 이 초월성의 미학은 그 안에 들어선 자를 무한의 거리로 압도한다.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게 될 것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무엇보다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 바로 이 초월성의 미학이었다. 차안과 피안, 세속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갈라놓는 무한의 거리, 이것이 초월성의 미학을 가동시킨다.

무한의 거리가 만드는 장대함과 달리 내재성의 미학은 차라리 소박하고 고졸하다. 이는 불교 ‘이전’의 신들, 즉 자연 속정령들과 더불어 나타난다. 자연물에서 특이한 힘의 표현을 읽어내는 ‘원시적’ 감각은 그 자연물에서 신적인 것의 존재를 본다. 신이란 무한의 거리 저편이 아니라 나와 인접한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교가 전래된 지역, 특히 한국에서 유난히 자주 발견되는 크고 작은 수많은 마애불들 또한 이 내재성의 ‘종교적’ 감각과 연속적이다. 거대한 바위가 그 자체로 오랫동안 신적인 힘의 거소로 인지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종종 그것은 그게 속해 있는 산이나 언덕의 ‘얼굴’로 간주되기도 한다. 아미타불이나 미륵불처럼 중생의 소망을 담은 신성한 이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그 바위들에 깃든 힘이 구원의 힘으로 왔으면 하는 소망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아직 ‘자연물’이나 흰 벽으로 남아 있는 신성한 사물에 제대로 된 얼굴을 새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그런 소망에서 발아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것이라고 하겠다. 그로써 내가, 아니 사람들이 어찌해볼 수 없는 세간의 어려움을 헤쳐가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더구나 불교는 일찍이 사람들 간의 신분 간 격차를 부인했고, 나중에는 유정물과 무정물의 격차도 부정했으며, 화엄종에 이르면 먼지처럼 미소한 것에까지 연기적 우주를 보면서 모든 존재의 평등함을 선언하지 않았던가. 신이나 신성함이 있다면, 인간과 고양이, 바위와 먼지 어디에나 깃들어 있는 이 연기적 우주이고, 연기적 관계를 깨달을 능력으로서의 불성 말고 또 무엇일 것인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모든 자연물이 잠재적 부처이고, 잠재적 신인 것이다.

그러니 힘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가진 게 적으면 적은 대로, 능력에 닿는 ‘상대’를 골라서 정을 먹였을 것이다. ‘자격을 갖춘’ 탁월한 장인이 나섰을 수도 있고, 그저 약간의 재능이나 여유만으로 선뜻 나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새겨진 형상이 종종 세간의 중생들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정질을 하던 조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많은 마애불들처럼 저부조나 평면상을 취하는 불상은, 바위를 ‘배경’ 삼아 형상을 애써 도드라지게 하는 대신, 바위에 스며든 듯, 바위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듯 애써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바위와 부처가 ‘둘이 아님’을 표현한 것 아닐까? 어쩌면 이런 마음이야 말로 미학적 내재성이란 개념으로 부각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

초월성과 내재성의 미학적 차이는 단지 크기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예컨대 크메르 왕국의 자이바르만 7세가 세운 바이욘 사원은 규모로 보나 축조의 인위적 성격을 보나 고딕 성당 못지않지만 그와 달리 내재성의 미학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바이욘 사원은 4방향을 향해 웃는 거대한 관세음보살상이 새겨진 54개의 커다란 탑신이 언젠가 벌어지며 꽃이 피어날 돌-봉오리인양 우후죽순처럼 사원 전체를 수놓고 있다. 돌들을 쌓아 만든 탑들이 새로이 돌탑을 만들고 그것이 전체 봉우리로 가득한 거대한 돌산을 이루는 듯 중첩과 반복은, 윤곽선이든 형태든, ‘전체’란 것을 어디서도 알아볼 수 없는 모호하고 비밀스런 분위기를 만든다.

돌들이 우거진 산인지, 돌들이 피어나는 산인지 모를 이 산에는 관세음보살의 얼굴이 가득하다. 하나의 돌이 아니라 벽돌처럼 조각난 많은 돌들로 만들어지고 울퉁불퉁한 면들과 세세한 장식선들이 섞여들어 돌탑인지 인물상인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기에, 이 보살상들 또한 돌들 사이에서 슬며시 비어져 나온 듯 보인다. 각 면을 가득 메운 인물상의 크기 또한 배경을 거의 남기지 않으며 돌탑을 채우고 있어서 여기서도 시선을 모으는 형상과 그것을 떠받쳐주는 배경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돌탑과 관음상은 하나인지 둘인지 알 수 없는 인접성 속에서 서로에게 스며든다. 그렇게 돌과 보살상이 하나로 섞이며 돌봉오리에 내재한 자비로운 힘이 웃으며 배어나온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고딕 성당이나 거대석불이 아래에서 그저 올려다 볼 수만 있는 시선을 겨냥해 만들어졌음에 반해, 바이욘은 돌봉오리 옆으로 올라가 옆에서 마주서거나 심지어 내려다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크기가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눈높이를 맞출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면, 나아가 내려다볼 수 있다면 크기는 아무리 거대해도 압도하지 않는다.

고딕성당과 바이욘 사원은 유사한 규모의 축조물이지만, 고딕성당이 그 크기를 통해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만들어 사람들을 밀쳐낸다면, 바이욘은 멀리 있는 이들마저 전체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모호한 형태의 비의성 속으로 끌어당긴다. 바이욘에는 신적인 인물이 흘러넘치지만 어떤 초월자도 없고, 놀라운 비의적 신성으로 에워싸여 있지만 어떤 초월성도 없다. 그 신적인 인물은 바위만큼이나 우리 자신에 내재하는 신이고, 그 비의성은 자연만큼이나 우리가 기대어 사는 세계의 비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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