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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돌봄의 사회적 파레지아

2022/06/26 윤춘근

 

1. 서론

2. 언행일치 파레지아

3. 타인은 무엇인가

4. 과시욕망

5. 사회적 파레지아:

6. 결론

 

1. 서론

푸코가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가진 <진실의 용기>라는 강연의 기본 개념인 파레지아가 단순히 철학적 개념들 중 하나로 그치기에는 개운치 않은 아쉬움이 남는다. 푸코의 행적을 볼 때 단순히 개인 주체의 자기돌봄만을 주장하고자 파레지의 계보를 탐구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적 주체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주체이다. 지금이 원시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현자의 은둔이나 견유학파의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적 주체를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사회적인 것은 정치와 분리해서 다룰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상대적 존재인 타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사회로부터 소외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덕이라는 것도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규범 형식들 중 하나이다. 이처럼 타인과 함께 얽힌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 내에서 파레지아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타인에 대한 담론으로 사르트르와 들뢰즈를 참고 하였고, 사회에 관해서는 장자크 루소를 참고하였다.

타인을 평가할 수 있는 권리는 사회적 위계와 상관없이 상호적이며, 수많은 결정을 마주하는 삶 속에서 타인과 맺는 사회적 관계는 각자의 주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타인의 조언을 고려한 판단은 혼자만의 결정에 비해 합리적이고 적절할 때가 많다. 그러나 어떤 결정이든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짊어져야한다. 따라서 타인의 평가와 판단에 대해 믿을만한 근거를 주체가 스스로 확보해야만 하고, 그것은 그들의 파레지아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2. 언행일치 파레지아

파레지아(parrhésia)는 ‘진실의 용기’ 또는 '모든 것을 말하기'의 그리스어 이다.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이 아니라 진솔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말하기를 의미한다. 푸코는 파레지아를 단순히 수사학적 기술이라기보다는 발언의 실천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진실 말하기의 형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예언, 지혜, 교육, 고백, 파레지아. 푸코는 이러한 '모두 말하기'의 역사가 자기 사유의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에피멜레이아 헤우토 epimeleia heautou', 자기돌봄을 확보한다. 진실을 말함이라는 테마는 네 가지가 있다고 푸코는 정리하였다. 신을 대리해서 말하는 예언가의 예언, 이때 말하기의 내용은 미래에 대한 것으로 수수께끼나 모호한 형태를 띤다. 현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지혜. 기술자, 교사, 전문가에 의해 그들이 익힌 바를 그대로 전수하는 교육, 이는 위험 없이 논증적인 방식으로 말해진다. 고백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백은 모든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타인에게 말해야만 하는 의무를 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진실의 용기 즉 파레지아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파레지아는 파레지스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말하기이다. 이때 말하기는 용기이다. 상대와의 관계에서 단절이나 폭력의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과 타인의 변형, 즉 다르게 사는 삶을 위한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다. 용기에 대하여 플라톤은 <라케스>에서 “두려워할 것들과 대담하게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앎이며,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로 정의 하고, 무모함과 대비시킨다.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의무는 스승, 인도자, 지도자, 말하자면 자기돌봄을 필요로 하는 '타자'에게 적용되는 계율로서 나타난다. 자기돌봄을 이끌어 주는 타인은 파레지아를 실천하는 파레지스트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갈레노스는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선한사람,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완전함으로 가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지속적인 수련(askêsis)이 요구 된다고 한다. 평생에 걸친 수련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련을 위해 스승으로서의 파레지스트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타자인 파레지스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플루타르코스는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에서 아첨꾼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라고 한다. 그리고 파레지스트와 유사한 탁월한 아첨꾼도 있다고 한다. 진짜 아첨꾼은 당신에게 가혹한 것, 불쾌한 것, 결점 등을 확실하게 말해줄 그런 자일 수 있다. 이처럼 파레지스트로 위장된 아첨꾼을 찾기 위한 방법을 갈레노스의 텍스트가 답한다. 진정한 파레지스트를 찾고자 한다면 좋은 평판을 가진 자에게 문의해야 하고 그를 유의해서 살펴봐야하고, 신중하게 추적해야한다는 것이다. 좋은 평판을 가지며 자신에게 엄격함을 가지고 당신에게 하는 말이 가혹하고, 경멸적이고, 끔찍하더라도 이를 듣는 것이 유용한 시련이며 훈련이라고 제시하는 자가 자기돌봄을 도와줄 파레지스트라는 것이다. 이 때 듣는 상대방 즉 제자에게는 프로아이레시스proairesis가 필요하다.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함께 놀고 싶어지는 어린이 유사성과 같이 스승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제자도 스승에 대한 존경과 학습태도가 프로아이레시스로서 스승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프로아이레시스는 일종의 엄격한 실천 의지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대화 상대 간에 엄격함이 필요한 이유는 실제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지식에 대한 엄격함이 아닌 행동에 대한 엄격함을 요구한다. 파레지아는 기교를 부린 연인의 입맞춤인 수사학적 작위가 아니라 어린 아이에게 하는 입맞춤처럼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말하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격함이 진실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위선, 가식이 아닌 엄격함에 의해 언행에 내포된 주체가 드러나고 그들이 말한 진실이 그들 자신임을 보여줄 수 있게 된다. 솔직한 파레지아가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정기적으로 타자 앞에 불려 나가 자신의 주체성이 아닌 타인이 부여하는 자기점검을 받아야 한다. 나르시즘과 댄디즘에 빠지지 않도록 타자의 거침없는 말로 우리 자신을 점검받아야 한다.

파레지아는 대화 당사자의 모든 언행이 당사자 그 자체임을 증명하는 행동으로써 '자기돌봄'의 토대가 된다. 자신의 삶을 긴장 속에 놓음으로써 주체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3. 타인은 무엇인가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심리적 체계들이 개체화 되는 과정에 어떤 구조가 있으며, 이 구조는 나-자아에 의한 구조가 아닌 것으로 타인autrui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다. 들뢰즈에게 타인은 어떤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서, 타자에 대한 자아이자 자아에 대한 타자이다. 랭보의 말을 인용하면 “나는 타자이고 타자는 나“라는 것이다. 이런 타인은 선험적 구조이고 타자 자신의 표현적 가치를 통해 정의된다. 예를 들어 겁에 질린 얼굴을 생각해보자. 이 얼굴은 어떤 가능한 세계 ㅡ겁을 주는 무서운 세계ㅡ를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특별한 경험조건으로서 표현되는 것이 표현하는 것의 바깥에 있는 우리에게 실존하지 않을 때 타인은 어떤 가능한 세계의 표현에 해당한다. 또 다른 예로 사랑은 언제나 어떤 가능한 세계다. 자신을 표현하는 타인 속에 감싸여 있는 그런 가능세계를 현시하면서 사랑이 시작된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미지의 세계로부터 나를 구별하는 걸까?”알베르틴에 의해 표현되는 가능한 세계를 펼쳐 내는 길고 긴 설명이 있고, 이 설명이라는 바깥주름운동을 통해 그녀는 때로는 매혹적인 주체로, 때로는 환멸의 대상으로 변형된다. 그리고 타인이 표현하는 가능세계는 언어를 통해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다. 언어의 기능이 실제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본체의 발현, 표현적 가치들의 상승, 궁극적으로 차이의 내면화 경향이다. 들뢰즈는 언어를 수단으로 가능세계에 실재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파레지아에 적용할 때 가능세계는 파레지스트의 품행으로 표현되는 ‘진실함’의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다. 이러한 진실함에 실제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다.

타자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사르트르는 '타자란 나를 응시하는 자'라고 정의 한다. 응시라는 개념은 단지 바라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선이 닿는 곳의 모든 것을 객체화 시켜버리는 힘으로 규정되고 있다. 타자는 나에게 객체성을 부여하는 존재로 내 앞에 나타나며,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주체성을 포기할 수 없다. 결국 나와 타자의 관계는 갈등과 투쟁이 존재론적으로 필연이 된다. 그래서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라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즉 타인에 의해 나의 존재를 강탈당하는 것이다. 나는 타인에 의해서 규정되고 보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옥에서 관계 맺는 타자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타자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의 시선이 타자를 포획하느냐 아니면 타자의 시선에 먹히느냐 하는 투쟁적 관계이다. 타자는 언제나 사냥꾼인 '주체'이거나 혹은 먹잇감인 '대상'일 뿐이다. 갈등 관계로 규정된 타인들과의 투쟁에서 생존을 위해 개인들은 한명의 지배자에게 복종의 사회계약을 기꺼이 맺고자 한다. 또한 갈등이나 투쟁이 필연적인 사회적 주체는 과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여 타인보다 더 훌륭한 존재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상호성에 의해 각각의 주체는 서로 과시하며 상대를 서로 의심한다. 이러한 갈등의 관계는 타인을 자기 존재 과시의 매개로 삼기위해 타인을 즉자화, 객체화, 즉 비하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상호 매개적인 지옥의 관계에는 자기돌봄에 의한 타인돌봄이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계에 타자는 이미 존재했고 그 곳에 내가 던져졌기에 주체는 선험적 타자를 전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기 돌봄의 실천이란 타자에 대한 배려를 내포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때의 타자에 대한 배려를 사르트르는 ‘희극‘이라 하며 그의 자전적 소설<말>에서 자신이 아이였던 시절 부모의 칭찬과 사랑을 받기 위해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연기를 하는 자기 과시적 행동을 사례로 든다.

이외에도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얼굴과 찌푸린 얼굴이 있다. 사르트르의 타자는 갈등과 투쟁의 관계이고, 들뢰즈의 타자는 무한이며 미지의 세계이다. 어떤 타자이든 사회적 주체들이이며 파레지아를 통한 소통만이 관계들 사이에 놓인 왜곡을 제거할 수 있다.

 

4. 과시욕망

푸코는 과시욕망의 부정적 모델로 소피스트로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돈을 받고 실천하지 않는 지식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말과 행동을 달리 할까? 사회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미래에 대한 염려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다.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사회의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는 개인의 이익에서 파생된 말을 하기 때문에 진실과 행동과 언어들 상호간에 연결 없음이 이상하지 않다. 장자크 루소는 자기에 대한 배려를 자기편애(amour propre)와 자기애(amour de soi)로 구분한다. 푸코가 주장하는 자기 돌봄은 자기애와 가깝다.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악당은 ‘자기편애’이다. 이 것은 자존심, 허영심, 자만심 등 ‘자기중심주의’나 이기심 같은 심리학적 특성이다. 자기 편애는 사회에서만 등장하며 우리가 느끼는 사회적 불만의 원인이다. “자기편애를 자기애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두 정념은 그 성질이나 효과에서 아주 다르다. 자기애는 모든 동물로 하여금 자기보존에 신경 쓰게 하고, 이성에 의해 인도되고 동정심에 의해 변형되어 인간애와 미덕을 자아내게 하는 자연적 감정이다. 자기편애는 사회 속에서 생긴 상대적이고 인위적인 감정이다. ... 서로에게 해악을 부추기기도 하지만, 명예의 진정한 원천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기편애는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제시되지만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느끼는 욕구,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도 관련이 있다. 루소는 이 인정욕구가 정의의 뿌리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타인에 대하여 배려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인정하겠는가? 결국 상호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정의로운 사회의 기반이 되는 셈이다. 다른 한편 인정받지 못할 때는 수치로 인한 분노를 유발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각 개인 간 인정투쟁을 역사 발전의 기본요소로 활용한다.

최근 유행어인 ‘관심종자’라는 개념을 보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돌봄의 관점이 아닌 상대를 비하적인 대상, 즉 사르트르의 즉자화, 매개화 방식으로 타인을 규정하고 자신은 그들보다 ’우수종자‘가 된다. 그들은 문명화된 자신을 피부색으로 구별하기 위해 “니그로’를 창조하고 죄의식 없이 검은 타인을 도구로 사용한다.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타인을 지옥으로 던져 넣고 이단으로 배제하며 사회적 소통을 차단한다. 파레지아를 원천봉쇄하는 군주에 의해 인정욕구가 부정적 ‘관종‘으로 환원되어 묶여버린다.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적 동물로서 누구나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는 당연하고 자연적이다. 루소의 말처럼 관심종자이기에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 실천여부와 관계없이 돈을 벌기 위한 말을 주로 하는 소피스트나 ’우수종자‘의 진짜 문제는 다른데 있다. 그것은 말과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망각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탁월함을 돋보이기 위해 과시하고 상대를 규정하고 평가하면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자기돌봄이 결여된 채 자신을 탁월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또는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망각된 주체는 자신을 속이고 타자를 속인다. 이런 상황에서 파레지아는 불가능하고 소통이 차단되어 사회를 위험에 빠뜨린다. 그러나 자기돌봄을 위해 타인에게 자신에 대해 말하는 과시의 분명한 표현들은 파레지아다. 여기서 표현은 절제된 행동이나 매무새 언어등에 의해 표현되는 가능세계의 외형들이다. 파레지스트인 스승은 자기 과시적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같이 자기 자신을 돌보도록 조언해야 하는 것이지 ’니그로’를 규정하는 우수종자가 아니다.

타인에 대한 태도에 관하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부르주아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개인은 자기 자신 안에서 사는데 반해 언제나 자기 자신 밖에서 사는 사회인은 타인의 평판 속에서만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혼자 있어 외로울 땐 타인만을 생각하고 타인과 함께 있을 땐 자기 개인만을 생각하는 사람, 심지어 사회적 유대마저 일종의 계약으로 간주하는 사람을 부르주아라고 한다. 지금 우리는 루소가 말하는 개인만을 취하는 부르주아적 태도를 지향하며, 자신을 망각하고, 타인을 사적 도구로 생각하는 반-파레지아 성향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5. 사회적 파레지아

사회를 구성하는 관습과 타인의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견유주의가 유일하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노동은 노예와 시민이 아닌 여성들이 담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권적 그리스 시민은 자유를 갈망했다.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에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시작하는 문구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타인이 부재하지만 섬 스페란챠가 타자의 역할을 하며 제국을 설정하고 스스로 시민이며 통치자가 된다. 사회에 속한 이상 누구나 정치의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참여의 방법이다. 홉스와 로크가 생각하는 자유란 법에 의해 규제받지 않는 자연스런 인간 행위의 영역을 뜻한다. 그러나 루소에게 법은 우리의 자유가 시작 되는 곳이다. 전체의 일반의지를 사회에 양도했을 때만이 개인들 서로가 자유롭다는 것이다. 즉 법에 의해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말이다. 칸트는 루소의 영향을 받아 전체의 일반의지가 보편성을 갖게 된 것을 정언명령이라 하고, 사회에 양도된 일반의지는 하늘에 빛나는 별이며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 된다. 따라서 칸트의 보편적 도덕률은 외부의 관습이나 규범이 아니라 스스로 정한 법 즉 양심의 소리, 다이몬의 명령, 진실의 용기이다.

군주는 시민이 선출한 대표의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권력을 쟁취하였거나 상속된 권력자이다. 권력을 가진 개인일 뿐이다. 군주가 조언자에게 파레지아를 허락하는 것이 올바른 군주의 덕인 것처럼, 민주주의는 우리가 선출한 대표에게 우리를 통치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파레지아를 실천하는 진실성에 주목하게 된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는 아무 말이나 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내가 속한 사회의 일반의지를 실현해야하는 의무를 진 자이다. 따라서 나의 주권을 위해 일하도록 허락된 정치적 대표는 파레지스트이어야만 한다. 파레지아로 증명되지 않은 정치적 대표는 일반의지를 따르는 나의 주권을 위해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아첨꾼으로만 존재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에피멜레이아(자기돌봄)를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 펼치는 가능세계만이 우리의 주권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무원에게 금욕주의적 실천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법에 의해 임명된 관리자로서의 맡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파레지아적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직무의 수행이 시민을 위함이 아니고 사적 개인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파레지아적 실천이라 할 수 없고, 임명된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루소는 우리에게 공통의 의지인 일반의지가 있으며 이것이 곧 법이며 민의라고 한다. 일반의지에 의해 정치를 하도록 선출된 대표는 직무상 개인을 위한 세계를 구성해서는 안 된다.

파레지아는 단순 계몽적 구호가 아니라 우리가 사회적인 조건 안에 있을 때, 모두의 주권을 위한 최선의 수단이 된다. 파레지아 점검이 사회에서 일반화 될 경우 정치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자기돌봄을 위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파레지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출된 대표가 개인의 이익이나 사적 권력을 위해 국민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지 않은지 늘 감시해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법에 의해 자유로울 수 있다. 국민을 돌볼 능력을 갖춘 파레지스트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장치들(언론, 노총...) 또한 사적사용을 멈추고 공적사용으로 검증기능을 살려야 한다. 루소는 국민 전체의 일반의지만이 진정한 주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반의지는 법으로도 표현된다. 대표에 대한 검증방법을 법으로 제정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무엇으로 검증의 도구로 삼을 것인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말이나 생각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의 과거는 영원하다. 그 과거가 개인적이지 않고 사회적이라면 그는 파레지스트의 자격이 갖춰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표현은 사적이지 않은 공적인 목적을 가진 행동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종교 활동에서 사적인 것은 개인적인 구복활동에 목적을 두는 것이지만, 공적인 종교 활동은 신앙심에 바탕을 둔 봉사활동 같은 이타적 활동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공적인 활동과 사적인 활동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경제 등 인간 활동 모두에 적용할 수 있다. 파레지아로 인정되는 활동은 모두 공적인 것들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 사적인 활동은 파레지아가 아니며 대부분의 분야에서 부패와 폭력의 원인이 된다. 이는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파레지아를 실천하는 삶이란 공적인 목적이 내포된 사회적 활동과 같은 개념이라 말할 수 있다. 파레지아가 진실의 용기로 해석 된다면 여기서 실천에 대한 앎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인 용기의 관점에 놓고 한 개인의 과거 행적을 살피면, 그 사람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즉 개인의 속성은 그의 과거와 같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훗날 그의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어도 계속 쌓이는 그의 과거는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파레지스트는 말이나 외형적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 선한 행동의 경우 공적인 기회가 많지 않고, 숨기기도 하므로 드러나기 어렵다. 반면 악의 경우 대부분 공과사의 전도이다. 법을 위반하거나 직무를 유기함으로써 나타나기 때문에 쉽게 노출이 된다. 그러므로 정치인과 공무원 개인의 과거를 본다는 것은 악을 찾아내고 감시한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6. 결론

파레지아가 참된 진리가 되는 이유는 말이 아니라 행동의 진실성 때문이다. 말은 거짓이 아니지만 진심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행동에 각인된 태도는 선하든 악하든 속내의 진실을 담지하고 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는 말의 내용이 진심이라서 보다는 인사하는 행동 때문에 진심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파레지아 또한 말을 중심으로 정의로운지를 파악하는 것 보다는 그 사람의 행동으로 정의로움이 규정되어야 한다. 익명성 뒤에 숨은 자기망각에 의한 과시는 겁쟁이의 위선과 가식이지만 자기돌봄에 따른 과시욕망은 언어적 한계를 넘어선 파레지아로 인정받는다. 과거로써 나를 말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는 파레지아다, 이기적 자기관리 차원이 아니라 인류 또는 사회의 발전과 구성원 각자를 배려하는 실천으로서의 자기돌봄이다. 어찌 보면 사회적 파레지아는 진실-말하기가 아니라 진실-행동하기이다. 여기서 진실은 당연히 자기돌봄이다. 자기돌봄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돌봄을 위해 타자를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파레지아이며 자아실현이다. 매슬로는 욕구의 5단계를 말하며 최상의 욕구를 자아실현으로 본다. 따라서 사회적 파레지아는 자아실현을 위해 공적인 목적의 진실-행동하기로 정의할 수 있으며, 에피멜레이아와 파레지아에 대한 푸코의 정의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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