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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_인터뷰] 다시 인문학/ 우리가 사랑한 저자 3편 : 이진경
인문MD 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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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인터넷서점 예스24 인문 MD인 손민규입니다. 대학생 때 도서관에서 『철학과 굴뚝 청소부』, 『자본을 넘어선 자본』, 『모더니티의 지층들』을 읽었던 시절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서면으로나마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어 영광이고, 감사합니다. 최근에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반갑습니다, 감사하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하는 일이 비슷합니다. 읽고, 쓰고, 차 마시고, 요가하고, 지식공동체인 <수유너머104>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학교에서 강의하고…. 그때와 다른 점은 중국술을 좋아하게 되어 자주 마시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유튜브에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인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동영상 만드는 일을 하면서 글을 국제화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거 정도일까요?

 

『철학과 굴뚝 청소부』는 20년 전인 제가 대학생 때도 필독서였습니다. 『철학의 모험』은 『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 『철학의 모험』,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이라는 이름을 거쳐 다시 나왔습니다. 『철학과 굴뚝 청소부』나 『철학의 모험』 두 책 모두 오랜 시간을 견딘 책답게 사연이 많을 것 같습니다.

『철학과 굴뚝 청소부』, 이미 씌어진 지 30년이 가까워진 책이네요. 그 뒤에 쓴 책이 혼자 쓴 것만 해도 30권 가까이 될 거 같네요.ㅎㅎ 그래도 만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책이 그 책이어서, 양가감정이 들어요. 30년을 읽혔으니 그만큼 애정받고 있다는 말이려니 싶어서 기쁘지만, 그렇게 많은 책을 썼지만, 읽히는 건 몇 권 안 되는구나 싶어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사실 그 책은 대학생이면 한 번은 보던 시절이 있었으나, 그땐 출판사에서 인세를 챙겨주지 않아서 몇 권 팔렸는지도 알지 못해요. 그 출판사가 망하고 소유주도 바뀐 뒤 그린비로 옮겨서 다시 냈고 인세도 받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대학생들이 그런 책을 기본으로 보던 시절이 끝난 뒤였죠. 책 팔아 돈 벌 팔자는 아닌가 보구나 생각하고 있죠.ㅋㅋㅋ

그래도 전에 미국의 시카고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는 분이 수유너머에 와서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 책을 미국에서 읽을 때 너무 좋았다면서 러셀의 『서양철학사』보다 훨씬 좋은 책이라며 칭찬해주었는데, 비교를 좋아하진 않지만, ‘뭐 그 정도는 되지’ 했어죠. 사실 러셀의 그 책은 좀 별로라, 그리 좋은 칭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요, 호호호.

『철학의 모험』, 참 곡절이 많은 책이죠. 애초에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쓴 게 『상식 속의 철학…』, 『논리 속의 철학…』인데, 박사논문 쓸 시절 생활비가 없어서 『철학과 굴뚝 청소부』는 그냥 두었지만 이 책은 ‘푸른숲’이란 출판사로 옮겨서 『철학의 모험』으로 다시 냈어요. 책으로 돈 벌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먹고 살 최소 비용은 필요했으니까요. 그때 원고를 보면서, 미숙하고 유치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런 종류의 책으론 처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크게 고쳤고, 한 권으로 묶고 제목도 『철학의 모험』으로 바꿨죠. 철학이란 사유의 모험이란 생각에서. 그런데 새로 낸 그 출판사의 주간과 편집장이 따로 독립해 ‘휴머니스트’란 출판사를 차렸고, 거기서 『노마디즘』을 비롯해 여러 책을 냈어요. 그 출판사 대표는 한때 감방 생활을 같이 한 분이에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다른 분들도 자리를 옮겨 ‘푸른숲’에 아는 분이 없게 되었고, 그때쯤 휴머니스트 대표인 그 지인이 자기 출판사에서 다시 내자고 하여 『수학의 몽상』과 함께 거기로 넘겼죠. 새로 내면서 다시 크게 썼어요. 아직도 미진해 보이는 게 꽤 있었던 거죠. 제목도 『히치하이커의 철학여행』으로 바꿨고요.

사실 『철학의 모험』과 『수학의 몽상』은 20쇄 가까이 팔릴 만큼 잘 팔리던 책인데, 출판사를 옮기고 나서 무슨 사정에서인지 일 년 넘게 두 책 모두 나오지 않았고, 이후 나온 뒤에는 별로 팔리지 않게 되었어요. 절판되어 잊히는 사이에 아마도 대체재가 되었을 다른 책들이 많이 나온 거겠죠? 하여 다시 한번, ‘책 팔아 돈 벌 팔자가 아니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재작년에 예전에 함께 지하운동 하던 동료들과 만나면서 ‘생각을말하다’ 김홍중 대표와 알게 되었어요. 지하운동 시절엔 동료조차 만나거나 알지 못했기 때문에, 20년이 지난 뒤에야 만난 셈인데, 이분이 이진경의 팬이라면서 제게 중국술을, 그것도 비싼 마오타이주를 자주 주더라구요. 중국술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어가던 시절인 데다, 정말 좋아하는 술이라 얼마나 기쁘고 고맙던지…. 술에 홀딱 넘어간 거죠.ㅋㅋㅋ 그런데 얘기하다 보니 출판사를 하고 있고 제 책을 내고 싶다고 하여 도와주겠다고 했고, 일단 『수학의 몽상』과 『히치하이커』를 다시 써서 주기로 했죠. 제목도 둘 다 ‘모험’을 콘셉트로 하여 『수학의 모험』, 『철학의 모험』으로 고쳤어요. 둘 다 꽤나 많이 고쳤는데, 『철학의 모험』은 개정을 거듭하며 그래도 이젠 더 안 고쳐도 되겠다 싶은 ‘작품’이 되었어요. 물론 ‘작품’으로 만드는 게 잘 팔리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저는 책 팔아 돈 벌 팔자가 아닌지라^^ 그냥 책이 더 그럴듯하게 된 걸 자긍하고 있어요.

 


 

독자들이 읽는 책의 종류, 책이 소비되는 방식, 책이 알려지는 통로 등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책이 다양하게 출간되지만, 예전처럼 100만 부, 수십만 부 책이 팔리긴 쉽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를 쓰신 입장에서 이런 변화가, 솔직히 아쉽지는 않은지요. 지난 편에서 우석훈 저자님은 “요즘은 책으로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이미 유명해진 사람이 책을 내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책이 어느덧 뒤의 시장, 후시장이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라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좀 지났지만 ‘인문학 붐’이 출판시장을 달구던 때가 있었죠. 그런데 제게 인문학 붐은 일종의 반어였어요. 인문학이 그리 크게 인기를 얻기 전, 저는 그래도 나름 잘 팔리는 책의 저자였지요. 『철학의 모험』이나 『수학의 모험』, 『철학과 굴뚝 청소부』도 그랬지만, 2권으로 된 『노마디즘』 그 두꺼운 책도, 분명 쉽지 않을 책인데 많은 분이 사서 읽어주셨죠. 그것 말고 심지어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제 해석을 담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 같은 책도 꽤 많이 팔렸어요. 그런데 인문학 붐 이후에 쓴 책들은, 대중적인 스타일의 책도 있었으나 예전같이 팔리지 않았어요. 인문학 붐과 저는 반대방향의 길을 가고 있었던 셈이죠.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소비되는 게 인문학 붐의 요체였는데, 저는 쉽게 쓸 때조차 무언가 깊이 있는 것을, 남들이 말하지 않은 것을 쓰려고 하여 그랬던 거 아닐까 싶어요. 그 이후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을 보면, 제목이 내용의 절반 정도인 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또 하나 베스트셀러의 중요한 특징은 방송이나 유튜브 같은 시각매체를 통해 알려진 저자들의 책이란 점이었어요. 우석훈 선생 말대로 방송으로 유명해진 분의 책이 아니면 안 읽히게 된 거 같아요. 양쪽 다 이미 알고 있는 걸 그럴듯하게 다시 말해주는 책을 써야 잘 팔리는 시대가 된 걸 뜻하는 듯해요.

그러니 저처럼 ‘이미 알고 있는 걸 왜 글을 쓰고 책으로 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읽히고 팔리는 걸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심신에 좋은 시절이 된 거 같아요.ㅎㅎ 어차피 책 팔아 돈 벌 팔자가 아닌지라, 이미 거기엔 많이 익숙해져서 마음이 상할 일은 없지만 말이에요.

 

이진경, 하면 저는 주체, 근대성, 외부, 혁명 등의 단어가 떠오릅니다. 20세기 선생님의 관심사와 21세기 선생님의 관심사는 어떻게 변해왔을까요?

1990년대는 제게 물음의 시대였어요. 근본적인 물음의 시대. 그건 또한 방황의 시대, 혹은 유목의 시대이기도 했어요. 화두 같은 물음 하나 들고 이런저런 영역을 횡단하며 잡학자가 되어가던 시절.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운동을 하면서 저는 마르크스주의자, 아니 레닌주의자가 되었고, 그래서 감옥에까지 갔는데, 그 감옥에서 레닌이 만든 사회주의 세계가 붕괴하는 걸 목도해야 했죠. 하여 내가 알던 모든 것,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이 모두 침수되며 바닥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갔어요. 거기서 저는 이전에 가졌던 지식이나 믿음, 모든 답을 물음으로 바꾸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 물음을 들고 철학사를 필두로 수학사, 시간, 공간, 미술과 건축, 역사, 영화 등 ‘근대성’과 관련된 여러 영역을 횡단하여 공부했어요. ‘주체’란 떠나야 할 과거의 지반이었다면, ‘외부’란 나를 가두고 있는 근대성이란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방향타였어요. 그런 식으로 과거에 꿈꾸었던 혁명을 넘어 새로운 혁명을 사유하고 싶었던 거예요.

2000년대에도 이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다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며 물음을 던지고 문제를 발견하고 답을 찾는 가운데, 어렴풋한 상들이 조금 생겼어요. 들뢰즈에게 배운 차이의 철학과 노마디즘, 그리고 제 나름대로 구상하여 <수유너머>에서 계속 실험하고 실행하고 있는 코뮨에 대한 문제의식, 소수성이나 타자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 거기서 다시 시작하여 구성되는 존재론 등이 그것인데요, 얼마 전까지는 재일시인 김시종 선생을 통해 문학의 바다속으로 깊이 들어갔었고, 요즘은 이런 문제의식을 통해 유물론을 다양체로, 천 개의 유물론들로 증식시키는 데 관심이 가 있어요. ‘천 개의 유물론’이란 기흭 아래 <수유너머>의 동료들과 책을 준비하고 있죠. 2000년대는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공부한 것을 자원으로 삼아, 제가 들고 있던 물음을 벼리어 제 나름의 사유를 직조하기 시작한 시절이라고 자평하고 있는 셈이죠.

 


 

코로나 19로 우리 사회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정부에서 거리두기, 백신 접종 등 방역을 주관했고요. 재택근무, 유연근무가 늘었습니다. 이런 사건을 푸코, 들뢰즈의 개념으로 분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답하려면 길고 어려워질 거 같죠?^^ 간단히 말하자면, 푸코는 생명의 생산을 관리하는 권력인 생명권력에 대해 이미 오래전에 개념화했어요. 지금의 국가권력은 감염병과의 관계에서 그런 생명권력을 전면적으로 가동하고 있어요. 거리두기, 백신 등의 방역은 ‘살게 만드는 권력’의 작동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제를 대중이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죠. 그러나 권력이란 말에서 흔히 생각하는 부정적 뉘앙스만 있는 건 아니에요. 푸코는 권력이란 건강, 능력 같은 걸 생산하는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지적했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권력에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건강이나 생명을 자신이 관리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의사나 국가 등에 맡겨버린다는 거예요. 누군가 ‘그들’이 병을 진단하고 병을 고치고 해주리라는 생각에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죠. 이 점에서 보면 코로나는 말년의 푸코가 말하는 ‘자기에의 배려’라는 윤리학적 계기를 크게 약화시키고 있어요.

그러나 재택근무나 유연근무는 그 와중에 국가나 자본의 권력과 개인 사이에 다른 유형의 여백이, 자기관리하는 윤리학적 공간이 확장됨을 뜻하지요. 이러한 공간은 자본이나 국가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는 어떤 외부로 변환시켜야 해요. 국가권력이나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푸코식으로 말하면 ‘실존의 미학’이 작동하는 공간, 들뢰즈의 동료인 가타리 식으로 말하면 미학적 주체로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공간으로 말이에요. 욕망이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유목적 공간으로의 변환지대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저라면 이를 단지 개인화된 공간으로 응고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적 관계가 형성되는 코뮨적 공간으로 변환시켜야 한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간은 이내 사라지고 말 것이며, 개별화되는 동시에 전체성의 권력을 작동시키는 근대적 사목권력의 장이 되고 말 겁니다. 개인화된 공간이라는 환영 속에서, 전에 없이 개인에게 수용되며 강력해진 생명권력, 사목권력에게 생명과 인생을 맡기게 될 가능성이 크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선생님의 책을 그리 쉽게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근대 철학자로부터 현대 철학자까지, 때로는 영화 등 대중문화까지 아우르며 인간 존재 근원과 자본주의에 관해 깊게 사유하는 글이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거든요. 부끄럽습니다만,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도 없었습니다. 저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이런 다소 어려운 주제에 관해 글을 쓰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연구하고 사색하셔야 할 텐데요. 어려운 작업일 듯합니다.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독서와 연구 집필을 유지하기 위한 선생님의 생활 습관, 이런 게 있을까요?

사실 쉽게 읽히는 책은 안 읽어도 되는 책입니다. 뇌과학을 빌려 말하자면, 쉽게 읽힌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 다시 말해 그걸 처리하는 신경망이 이미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책이 힘든 것은, 읽은 걸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신경망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힘들긴 하지만 이렇게 하면 나이가 70이 되어도 뇌의 신경망은 증식되고 뇌의 능력은 확장됩니다. 편하게 살면 뇌는 최소 에너지를 사용하는 길을 따라가며 축소됩니다. 그 길의 끝에는 운동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기에 뇌가 사라진 멍게가 있습니다. 저는 치매란 뇌가 멍게화될 때 도달하는 상태라고, 다시 말하자면 멍게에 근접해가는 뇌의 상태를 표시한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사람과 만나고, 새로운 상황, 새로운 환경과 만나며 감각과 생각을 열어 새로운 것들이 입력되게 하고, 힘들여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하려 해야 합니다. ‘늙었다’는 것은 생물학적 연한을 뜻하지 않습니다. 늙었다는 것은 ‘입력장치는 고장 나고 출력장치만 가동되는 상태’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니면 입력해도 흘려보내고, 새로운 게 입력되어도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두드려 맞추며 살면 멍게가 되는 길의 한 문턱을 넘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난감하게 들리겠지만요.

뇌과학을 알아서 그런 건 아니지만, 사회주의 붕괴를 겪으며 제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것에 기대며 살다간 난감한 사태가 벌어진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이미 알고 있는 건 읽지 않아도 되고 남들이 알고 있는 건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답을 지우고 물음이나 문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미 갖고 있던 이론이나 개념을 항상 입력되는 새로운 사태와 대조해 다시 생각하며 물음의 대상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익숙한 음악,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 듣는 대신, 안 듣던 음악을 듣고, 익숙한 맛 대신 안 먹어보던 맛, 낯선 맛의 음식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는 달라지지 않았는데요, 덕분에 입력장치가 새로운 것에 대해 유연해지고 입력가능한 것의 폭도 넓어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마 계속하여 새로운 걸 공부하고 새로운 주제에 대해 쓰기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 아닐까 싶습니다.

 

MZ세대라고 하여, 한창 우리 사회에 MZ세대에 관한 담론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기도 하잖아요. 선생님께서 대학생이던 시절과 지금 대학생들은 어떤가요.

글쎄요. 제가 잘 모르는 분들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여 쉽게 판단하는 건 꼰대가 되는 길 아닐까 싶어 저는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더구나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과 지금의 대학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경찰이 학교에 상주하던 시절, 저처럼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도 그냥 하라는 대로 살기는 쉽지 않던 시절, 취직에 연연할 마음의 여유가 없던 시절, 하고자 하는 걸 하려면 감옥에 가는 걸 각오해야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지금은 그렇게 삶을 밀고 갈 확고한 대의도 없고 욕망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매력도 없는 시절이고, 취업조차 쉽지 않아 먹고사는 일을 찾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시절이죠. 공정이나 정의 같은 걸 시험이나 취업 같은 경쟁 조건의 공평성 이상으로 생각하기 쉽지 않기도 하고요. 등이 휠 것 같은 무게를 지고 그걸 버티며 살아야 하는 시절은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역으로 이는 그 무게를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훈련시키는 기회가 되기도 하죠. 무게에 찌든 사람을 양산하는 동시에 그걸 이겨낼 힘을 갖는 거인이 될 기회를 줍니다. 반면 목숨을 흔드는 그렇게 큰 무게 대신 여러 방향에서 신체를 파고드는 일상적 삶의 가시들이 많은 시절은 다양한 세계로 눈을 줄 수 있는 넓은 방향을 허용하지만 동시에 큰 것, 근본적인 것과 만날 기회를 축소시키지요. 자칫하면 난쟁이가 되기 쉽습니다.

니체는 ‘자랑할 만한 적을 가지라’고 했는데, 내가 싸우는 적이 큰 정도만큼 내가 커지지요. 저는 지금의 대학생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의 시대가 과거와 다르다는 생각은 하게 됩니다. 예전 시절이 목숨을 잃거나 두려움에 위축되어 소시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면, 지금 시절은 소소한 것에 인생을 내주며 난쟁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철학서 중에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책도 있고요. 요즘은 정통 철학서보다는 철학과 일상이 겹치는 지점을 재치 있게 푸는 책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철학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저는 무게 있는 정통철학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중이 읽긴 너무 어려운 책이죠. 저는 사실 철학과 일상이 겹치는 지점을 파고들며 철학을 무기로 만드는 책을 좋아합니다. 삶을, 일상의 삶을 바꾸어 놓는 무기, 그게 바로 철학이니까요. 그러나 삶을 바꾸는 무기가 정작 해야 할 일은 통념이나 상식이라는 이미 있는 답들을 지우고 물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 익숙한 감각과 생각을 바꾸고, ‘이래야 한다더라’고들 하는 삶을 바꾸는 무기여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한다더라’의 삶을 위해 장애물을 넘어서고, 익숙한 답들을 정당화해주는 그럴듯한 개념을 주는 것이 된다면, 철학은 무기가 아니라 독이 됩니다. 일상을 근본에서 바꾸며 다른 일상을 구성하게 촉발하는 책과 일상과 철학이 겹치는 부분을 찾아 철학적 개념으로 해석해주는 책은 비슷해 보이지만 정반대되는 책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런 책들이 어떤 책인지생각해보는 게 좋겠지요.

 


 

지식공동체 수유너머104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오래전부터 제도권 교육 외부에서 사유하시고 연구해오셨는데요. 처음 시작했을 때와 지금,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달라졌나요.

저는 지금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수유너머에서 동료들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외부에서 공부하고 외부에서 사유하려 했다고 생각입니다. ‘외부’란 제도권 바깥을 뜻하지 않습니다. 역으로 제도권 바깥에서 하는 강의 가운데 많은 것은 대학에서 할 것을 장소를 바꾸어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 제도권 안에서지만 기존에 없는 것을 강의하고 연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외부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디서나 외부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게 만들어낸 것이 어느새 내부화되는 경우도 있으니, 다시 시작하길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도 비교하자면, 수유너머가 만들어진 건 1999년인데, 그 뒤 10년 정도까지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이 이 외부를 찾아서 많이 왔어요. 전에 누가 그러더라고요. 그때는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수유너머’에서 뭘 공부하는가가 중요한 관심사였다고. 그만큼 대학원생, 아니 교수들조차 외부에 대한 관심이 강한 때였다는 말이겠죠. 그러나 이젠 그런 대학원생, 별로 많지 않은 듯해요. 오히려 지금은 학교와 무관한 분들, 연구와 무관한 분들이 많이 오시는 편이에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은 학교 안으로 영토화되었고, 자기 영역을 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죠. 이미 정해진 틀 안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게 대학이나 지적 능력의 발전에 도움이 될지는 모를 일이에요. 특정 기능이나 전문적 지식은 늘어나겠지만, 그래봐야 남들 하는 걸 하는 것이니 크게 성공하긴 쉽지 않을 거예요. 물론 취직하기에는 그게 더 쉽겠지만 말이에요

 

2008년 채널예스에 연재된 ‘정혜윤 PD의 그들은’에서 선생님께서는 『벽암록』을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꼽으셨습니다.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는지요. 선생님께 영향을 준 사람, 혹은 책을 꼽아주실 수 있나요?

『벽암록』 정말 멋진 책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디도 이해되지 않는데,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책! 도대체 어떻게 이런 책이 있을 수 있나 싶었어요. 지금 제게 꿈이 하나 있다면, 그런 책을 한 권 쓰는 거예요. 그러니 그 책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다 하겠지요.

제게 영향을 준 사람은 시기적으로 달라졌어요. 처음엔 마르크스와 레닌이었죠. 1980년대, 제 삶을 바꾸어놓고 제 생각을 방향을 강하게 끌어당겼던 분이죠. 그다음엔 푸코와 들뢰즈, 가타리, 특히 틀뢰즈가 그랬어요. 그리고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사상가인 모리스 블랑쇼를 빼놓을 수 없겠네요. 니체도 그렇고요. 이는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와중에 읽게 된 『벽암록』이, 원오 선사의 그 책이 또 제 사유의 감각을 바꾸어주었죠. 불교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책의 매력 때문이었어요. 이후 용수(나가르주나)의 공사상(‘중관학’이라 합니다)과 중국의 화엄사상에서도 많은 걸 배웠어요. 그리고 최근에는 재일시인 김시종 선생이 제 생각의 방향을 다시 한번 꺾었습니다. 존재의 존재론, ‘어둠’에 대한 사유로 저를 이끌어주셨죠.

 

지금 쓰고 있는 책이 있나요? 없다면, 혹시 쓰고 싶은 책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어느 정도 완성하여 나올 책은 인공지능에 대한 책입니다. 아직은 가제이지만 『인공지능에게 신체를 허하라』는 제목으로 나오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서울대 인공지능연구원 장병탁 원장님과의 대담집입니다. 그것 말고도 오래전부터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논문도 쓴 게 좀 있고 하여 책으로 낼 생각인데, 다른 관심이 요즘은 더 커지기도 하고 인공지능 관련 책도 나온 게 많아서, 뭘 따로 또 책을 내랴 싶어서 접었습니다. 그냥 저 대담집 정도로 만족하자 싶은 거죠. 그것 말고 준비하고 있는 책은 『천 개의 유물론』이라는 책과 『천 개의 개념들』이란 책입니다. 전자는 앞서 말했듯, 수유너머 동료들과 공동작업으로 유물론의 다양한 양상들을 천착하면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나름의 입장에서 이론적 연구를 시도하는 책입니다. 후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들에 대한 일종의 사전 같은 책인데요, 작년부터 유튜브에 올리고 있는 동영상의 원고를 수합하여 만들어질 책입니다. 그리고 니체에 대한 강의를 바탕으로 쓴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와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에 이어질 세 번째 책을 내년 정도에 출판하려 합니다. 이 책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강의를 바탕으로 쓸 책입니다.

 

끝으로 예스24 독자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책의 시대가 가고 있다는 얘기를 자주들 하지요. 맞을 겁니다. 읽는 것보단 보는 게 편하고 쉬우니까요.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편하게 살고 쉽게 보고 듣는 것만 보고 들으면 멍게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힘들여 운동할 때 건강한 신체가 지속되듯이, 힘들여 보고 듣고 읽을 때 건강한 감각과 사고능력, 좋은 삶이 가능해집니다. 이는 책과 동영상을 대비하는 것으론 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책도 두 가지 다른 책이 있는 셈이니까요. 그래도 책을 여전히 읽는 분들은 읽는 수고를 즐길 줄 아는 분들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힘들여 살 줄 아는 분들이고, 멍게가 되는 길과는 반대편 길을 가는 분들이리라 믿습니다. 이왕 그 길을 가는 것이니, 정말 읽어야 할 책, 익숙하지 않아서 읽기 어렵지만 나의 감각과 생각을 바꾸어주는 책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와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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