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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 Dance : https://www.youtube.com/watch?v=Eg_RWEoUIIc

「마르크스의 유령들」

※막상 적으려고 보니 이해가 온전히 되지 않는 말도 많고, 제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해봤습니다... ㅎㅎ;;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습니다. 읽을땐 분명히 살아있었는데, 이젠 죽은 느낌이네요... 

강연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 책은 1993년 진행되었던, 「맑스주의는 어디로whither?」라는 제목의 강연에 기반한다. 공산주의 국가의 몰락과 더불어 당시 신진 학자였던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서 언급하는 공산주의의 패배와 자유주의의 승리선언를 배경으로 한다면, 이 제목은 또 다른 물음인 「맑스주의는 소멸하고wither 있는가?」로도 들리게 된다. 다시, 이 물음은 맑스주의의 미래에 대한 물음이자 과거의 맑스주의는 ‘푸닥거리(Exorcismus)’되었는지에 대한 두 방향의 물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머리말
[①마지막으로 ②사는 법을 배우기/가르치기]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지는 오랜 테제,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말을 데리다는 뒤집어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의문은 플라톤의 말처럼 “살아있는 현존자가 스스로 자신에게 죽는 법/사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는 대신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서, 두 가지 경계를 깨뜨리는 것 같다. 마지막 이후의 사는 법을 이야기 하면서, 삶과 죽음의 대립쌍을 해체하고 죽음 이후의 삶, 살아남은 자들이 행해야하는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죽음은 나 자신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을 이후일 수밖에 없음이 도출된다. 즉, 그의 철학은 삶(to be)과 죽음(not to be)의 경계 위에(sur-vie) 위치하고, 이곳은 환영/유령들이 출몰하는 이접적인 장소이며, 타인들의 묘지다. 데리다는 이 죽은 자들에게의 평가절하를 철폐하고, 살아남은(survie)자로서 이들과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타인에 대한 책임과 유령들과의 정치(애도)를 호소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사는 법을 배우기』, 자크 데리다 : https://m.blog.naver.com/limitedinc/221386299424

[유령론과 존재론의 구도 : 비대상성, 현존하지 않는 현존하는 것] 유령론(Hantologie)는 존재론(Ontology)의 언어유희다. 데리다는 서양의 존재론의 역사를 존재들이 실체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서양의 형이상학은 존재는 현존하는 것을 현존하게 해주는 운동 내지 사건으로서가 아닌 어떤 항구적인 것, 코기토, 수브스텐시아, 우시아등으로 현존자내자 현존성으로 고착화해서 파악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실체 내지 비-실체로 이분법적으로 존재들을 나누었고, 비-실체적인 것들은 목소리 없는 존재들로 여기며 환상 내지 환영으로 취급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 경계에 ‘유령’이 존재한다고 적고 있다. 서양의 형이상학에 따르면 죽은 자(여기에 없는 자/-실체적)이지만 살아있는 이(실체)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자로서. 이 유령의 존재를 통해서 데리다는 기존의 존재론의 경계를 전복시키고 해체시킨뒤 이 틈새를 통해서 다른 방식으로 변형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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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_마르크스의 명령들

『햄릿』의 유령

 “뒤틀린 세월[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 아, 저주스런 낭패로다,

그걸 바로잡으려고 내가 태어나다니.”

『공산당선언』의 서막 “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령

데리다는 맑스의 『공산당 선언』의 서막과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이야기가 유령으로 시작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우선, 햄릿에서 등장하는 아버지(왕) 유령은 독특한 존재로, 데리다는 몇가지 특징을 잡아내고 있다. “①그가 되돌아옴으로써 처음 등장한다는 것과 ②비가시적이면서, 우리를 응시한다/시선의 비대칭성” 이는 유령이 가진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인데, 유령은 최후의 순간을 맞이 한 것이 다시 되돌아오는 존재이기도하고 보이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맑시즘을 대상으로 이것을 대입했을 때, 유령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지금 마르크스주의를 끝장내려고 혹은 푸닥거리하려는 자들이 계속해서 제시되는 있는 문제(기아, 빈곤, 난민, 노동.. 등등)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라는 계속해서 돌아오는 유령을 보고 한말이 아닐까. 그리고 동시에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유령과도 같았던 것들, 마르크스가 몰아내지 못했던 것들 또한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공산주의라는 것이 실현됨과 동시에 진짜 세계, 과거의 모든 이데올로기와 가상, 환영과 결별하는 것을 희망했던 맑스도 이러한 유령에게 고통받은 것이 아닐까. 이 햄릿의 왕과 같은 얼굴을 한 유령(spectre)의 권위(sceptre)가 이들을 괴롭혔던 것이었을 것이다.
 

◇유령은 왜 사라지지 않고 / 계속해서 돌아오는 것인가?

데리다의 말을 들어보면,

2.콩쥐라시옹conjuration,축귀/푸닥거리 p.108-111

해악스러운 영혼, 유령, 사후에도 되돌아오는 악령화된 힘을 파괴함과 동시에 부인하려고 시도하기. ... 축귀는 죽은 것이 실제로 죽었다는 것을 주술적으로 되풀이하는 데서 성립한다. 축귀는 주문들을 사용하여 진행되며 ... 축귀는 죽음을 선고하지만, 이는 살해하기/죽음을 선사하기 위해서이다. ... 그러나 실제로는 재확신시키고자 하는, 곧 우선 자신을 확신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재확신시키고자 하는 어떤 수행문의 문제인데, 왜냐하면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정말로 죽었는지 여부보다 덜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단, 생명 속에 죽음 및 생명의 타자의 타자성 이것이 없다면 생명은 생명 자신일 수 없을 것이다을 포함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삼고 있는 마르크스나 다른 사람들의 동일성론, 좀더 정확히 말하면 매우 타자론적인 동일성-존재론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어떤 살아있는 이가 죽은 이를 정말로 죽인 다음에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를 완전히 쫒아 버리려고 하지만, 그 살아있는 주체가 이미 죽은 이들이 묻혀있는 땅 위에서 먹고 자란 존재들이라는 것을 데리다는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주체 이전에 타자들이 존재했으며,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자들은 이 유령을 감내하지 않고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여기에서 유령론이 존재론을 극복하려고 했던 지점이 어디에 있었는지 이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유령이 돌아오는 이유는 “반복과 최초의 순간. 이것은 아마도 환영의 문제로서 사건의 문제일 것이다. ... 반복과 최초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반복과 최후의 순간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모든 최초의 순간의 독특성은 또한 최초의 순간을 최후의 순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매 순간마다 그것은 사건 그 자체이며, 어떤 최초의 순간은 최후의 순간이다. 전적으로 다른 것/ 모든 다른 것. 역사의 종언의 한 무대를 마련하기. 이것을 유령론이라고 부르자.”(34)

따라서 반복 가능성은 기원 이후에, 최초의 사건 이후에 비로소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기원 그 자체속에 기입되어 있다. 반복될 수 없는 것은 기원이 될 수 없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고압적으로 우리들을 괴롭히는 유령만이 있다면, 햄릿처럼 부당하게(injustice) 타인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으로만 그들을 맞이해야하는가? “햄릿으로 하여금 정의를 실행하도록, 사태를 다시 질서 정연하게 만들도록, 역사ㆍ세계ㆍ시대ㆍ시간이 자신의 정확한/정당한 기능의 규칙에 맞게 곧바로 그리고 법을 따라 나아갈 수 있게 그것들을 다시 바로 세우도록, 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정확히/정당하게 운명 지은 운명을 저주한다.”(55)

이러한 사명으로서, 범죄가 기원에 앞서 있다(57)는 식의 상속은 데리다 식의 표현에 의하면, (타자를) “징벌하고 처벌하고 살해함으로써만 법의 사람/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이것은 분명 억압이며 저주이다. 상속이 대대로, 이전에서 이후로만 흘러가는 것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갚을 수 없는 명령의 부채에 아마 우리들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데리다는 다른 시간-어긋남에 대해 다른 상속을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유령의 시간 : 시간과 정의의 문제]

“시간의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 (The time is out-of-joint)」”

◇시간(The time)의 어긋남을 바라보는 두 차원 :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하이데거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의 해석을 통해서 상속과 어긋남을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지금-현재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과거에 존재하는 것과 미래에 존재할 것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현존자로서 “잠시 머무는 것, 지나치는 순간”(63)으로 해석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이러한 자신의 순간성을 망각한 채로 현존을 고수하는 것을 아디키아(어긋남/부당함/어리석은 것)이고 이를 올바르게 잡는 것을 디케(정의/들어맞음/이음매)로서 파악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아디키아 상태를 디케 상태로 만드는 것, 디도나이 디켄 테스 아디키아(불의에 대하여 속죄를 받다)를 사고할 것을 호소한다.(64)

데리다는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의 내적인 갈등을 포착한다. 현존재가 근본적으로 아디키아인 존재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디케를 어떻게 줄 것인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질서를) 어떻게 주는 것인가? 여기서 준다는 것/선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68) 이에 하이데거는 현존이 타자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음매가 아닌가 하고 답을 내린다.

마찬가지로 데리다도 현존의 시간이 어긋나있음을 말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현존에 의해서 이 어긋남이 만들어지거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내부가 어긋나 있음을 이야기한다. “시간 자신이 이음매에서 어긋나게 될 때, 어긋나고 부조화되고 고장 나고 서로 맞지 않거나 부정확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시간이 몰시간적이라면?”(59)

“(하이데거)부당한 것을 바로잡는 어긋남과 다른 한편으로 (데리다의 하이데거) 타자와의 관계의 무한한 비대칭성을 열어 놓는 어긋남, 곧 정의를 위한 장소로서의 어긋남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59)의 문제가 데리다에겐 중요하게 부각된다.

여기서 우리의 질문이 나온다. 하이데거는 항상 그렇듯이, 그가 호의/은혜, 베풀어진 호의/은혜의 가능성 자체로 해석하는 것에, 곧 조화롭게 한데 모으거나 받아들이는 허여하는 일치에 호의적으로 기울어 있는 것 아닌가?”(69) 하이데거는 일치에 조금더 기울어 있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어긋남이야 말로 항상 악, 비전유, 불의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유일하게 타자로서의 타자에게 정의롭게 실행할 수 있는 또는 정의를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70)라며 반문한다. 데리다에게 디도나이 디켄 테스 아디키아는 불의에 대해 벌을 받는/주는 것이 아니라 “갚음으로 귀착되지 않는 [타자성가 타자일 수 있는 타자성을] 돌려줌”이다. 이를 데리다는 블랑쇼의 말을 빌려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것 자체를 함께 유지하는 것을 사고하기”(73)라고 한다.

◇차이(差移)/어긋남의 일차성

마르크스의 세 가지 말에서 또한 공명을 일으키는 것은 호소 내지 정치적 명령, 참여의 서약이나 약속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수행성은 언어행위 이론가들이 분석한 모든 수행문처럼 미리 존재하는 규약에 따르지 안으며, 오히려 그것이 지닌 단절의 힘이 제도나 헌법, 법 자체를 생산한다...법 이전의, 의미 이전의 법의 폭력, 시간을 중지시키고, 탈구시키고, 이음매에서 빠지게 만들고, 자연적인 거처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폭력, 곧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음. 만약 차이(差移)가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고, 또 모든 약속의 공간내기(expacement)에 의해, 공간 내기를 열어 놓기 위해 도래하는 장래에 의해 환원 불가능하게 요구되는 것이라면, .... 억제할 수 없는 차이에 안에서 지금-여기가 펼쳐진다.”(76)

“~적어도 해야한다에게 기회가 선사되어야 하기 위해서는, 이접과 중지, 이질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84)

  데리다는 이어서 타자의 절대적인 선행성 내지 선도래성/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선이질성 없이는 현존재는 불가능함을 이야기한다. “이 어긋남은 부정하거나 제거해야 할, 심지어 한탄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 계속해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은 환원 불가능한 이절성, 내적인 번역불가능성이다.” 이는 타자가 타자임을 인정했을 때, 이 어긋남의 의미가 징벌과 저주에서 벗어나, 이 틈이야 말로 이질적인 것들이 계속해서 들어올 수 있는 열려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왜 유령“들”인가?

그런 점에서, 가장 책의 첫머리에서 데리다는 자신이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서 유령이 단수 명사임을 되새기면서, 자신이 이 강연의 제목에 “유령들”이라는 복수 명사를 선택해야했음을 언급한다. 마르크스주의를 상속할 때, 과학 또는 이론의 힘으로 “좋은” 텍스트를 통합하거나 정화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81), 마르크스를 유령으로서 타자로서 상속하고자 하고 그 유령과 함께 하려는 그의 철학이 여기에서 엿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여담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수유104에서 진행되고 있는 ‘천 개의 유물론’이란 수업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진경 선생님이 쓰신, 유물론 선언의 마지막 부분의 유령들에 대한 논의가 왜 나왔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유령퇴장exit

참고자료 : 진태원, 「시간과 정의 : 벤야민, 하이데거, 데리다」, 철학논집 제 34집, 2013

진태원, 「해체의 정치철학으로서의 유령론」

자크 데리다, 『마침내 사는 것을 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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