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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6까지 들뢰즈 철학사 셈나가 있어 6시 이후에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끝나면 얼른 가겠습니다~!

에세이 발표는 줄친 부분 위주로 15분 내로 마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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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104 20201 봄학기 인사원: 타자성의 자연학]

효영

 

 

표상없는 AI는 어떻게 세계를 형성하는가

-드레이퍼스와 브룩스의 논의를 중심으로

 

 

1. 들어가며

아메리카 발견 몇 년 후, 스페인들은 카리브해 연안의 안티야스(Antilles) 제도에서 원주민에게도 영혼이 있는지 탐색하려고 조사단을 파견한다. 그들은 묻는다. “저들도 인간인가?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영혼이 있는가?” 궁금증을 가진 것은 원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든 존재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물음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저들도 인간인가? 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신체가 있는가?” 그렇게 스페인들이 원주민의 영혼에 골몰할 때, 원주민들은 백인의 시체도 썩는지 오랜 관찰을 통해 검증하려고 백인 포로들을 물에 빠트리는데 열중했다.

본격적인 인공지능 연구가 반세기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우리는 인공지능과 인간에 대한 유사한 물음과 마주한다. 한편에서 묻는다. “인공지능은 사유하는가? 아니면 단순히 계산하는 기계인가?” 다른 한편에서는 반대로 묻는다. “인간은 단순한 기계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특별한 존재인가?” 표면적으로 전자가 인간과 관계하는 인공지능쪽에 주의를 기울이는 로봇공학자들의 물음이라면, 후자는 인공지능과 관계하는 인간편에 관심을 쏟는 철학자의 물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정은 생각보다 복잡한데, 물음이 예화하듯 인간과 인공지능 양자는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 상호의존의 형태로 함께 세계 속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모사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사유를 재조명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은 점점 더 많은 일들을 인공지능에게 일임하는 방식으로 인공지능의 새로운 기능발굴에 전념한다.

이러한 상호얽힘의 관계성 내지 긴밀히 결부된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제 물음은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인공지능과 인간 각자의 정체성을 따져 묻는 질문이기보다 상호관계성을 향한 것으로 다시 던져져야 한다. 이로써 우리의 논의는 인간이나 인공지능의 고유한 본질 탐구가 아닌 양자의 관계성에서 출발한다. 인공지능과 인간은 상호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서로기댐의 형태로 존재하는가? 그로써 순진한 호혜의 관계 내지 맹목적 적대가 아닌 다른 어떤 가능한 관계가 사유될 수 있는가? 우리가 카리브해 연안의 작은 제도들을 점령하려던 식민자들의 시도가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만큼이나, 식민자들을 잠깐이나마 신적인 존재자로 오인했던 원주민들의 순전한 믿음에서 불길한 조종(弔鐘)을 듣는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당위적인 지배론도 아니고, 인공지능에서 기인할 미래를 향한 막연한 진보론도 아닐 것이다.

2. ‘세계’와 ‘표상없음’

인간과 인공지능이 상호얽힘의 관계성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하에서 우리는 이들이 동일하게 자리하는 세계로부터 출발한다. 이로부터 함께 세계 안에 존재하는 존재자로서의 로봇과 인간의 지위가 고찰되는 양상을 철학자의 편에 선 드레이퍼스와 로봇공학자의 입장에 선 브룩스의 논의를 통해 살피고, 그로써 로봇이 인간과 함께 세계 안의 존재로서 어떻게 함께의-세계를 형성하는가의 문제를 검토한다.

 

 

2.1 세계 안의 존재: 하이데거의 현존재와 브룩스의 로봇

드레이퍼스(H. L. Dreyfus)는 대표적으로 인공지능의 가능성 자체에 냉담한 태도를 견지해온 버클리의 철학자다.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일: 인공지능의 한계』(1972)라는 초기 저작의 비판적 관점은 다시 『컴퓨터가 여전히 할 수 없는 것: 인공적인 이유에 대한 비판』(1992)으로 이어졌고, 급속한 인공지능 기술 발전이 목격된 시점에 작성된 「하이데거 AI는 왜 실패하는가」(2007)에서도 동일한 관점이 견지된다.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에 입각한 현상학자인 그는 인간이 마주하는 세계란 기계가 마주하는 그것과 결코 같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인간 지능의 비형식적 측면들, 즉 판단들, 맥락의 인식, 미묘한 지각적 구별들은 기계적 과정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엄청난 계산과 처리력으로 눈부신 성취력을 보장하는 기계라도, 세계 내에 거주하는 현존재가 세계와 맺는 방식은 기계가 모방하거나 학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를 사용할 때, 그는 그것의 객관적인 특징이나 손바닥의 압력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막대기는 그의 몸처럼 사물에 투명하게 접근되어 있다. 드레이퍼스는 이러한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은 오직 인간에게만 가능하다고 본다.

동일한 맥락에서 드레이퍼스가 계승하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란 인간의 고유한 존재성격이다. 모든 존재자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기에 ‘현존재(Da Sein)’라 칭해지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구성틀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다. 즉 인간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자들 역시 세계에 존재한다. 물론 하이데거는 이를 구분한다. 현존재를 제외한 사물들, 자연사물들, 가치있는 사물들도 ‘세계내부적 존재자(innerweltichen Seienden)’로서 세계 속에 존재하지만, 그들은 결코 존재의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스스로 세계의 안에 있음을 존재론적으로 인식하는 세계-내-존재인 현존재와 달리, 다른 존재자들에게는 그러한 세계 안에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돌과 같은 물질은 세계없음(Weltlosigkeit) 속에, 동물은 세계빈곤(Weltarmut) 속에, 인간은 세계형성(Weltbildung) 속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집짐승들과 함께 같이 존재하고는 있지만, 그 ‘함께 같이 존재함’은 ‘함께 같이 실존함’은 아니다. 개는 실존하지 않고 그저 살아가기만 한다.

다른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현존재의 특성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함으로써 자신이 세계 안에 본질적으로 있음을 인식하고, 세계 내의 다른 존재자들을 관통하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존재자에 접근하는 유명한 두 가지 방식이 제안된다. 하나가 다른 존재자를 어떤 주의깊은 시선이나 사유없이 ‘둘러봄(Umsicht)’을 통해 ‘–을 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손-안에-있음(Zuhandenheit/readiness-to-hand)’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일상적·도구적 사용을 멈추고 그저 ‘바라봄(Hinsehen)’을 통해 ‘거기에서부터’ 드러나는 ‘눈-앞에-있음(Vorhandenheit/presence-at-hand)’이다. 이 점에서, 현존재의 존재의미 분석은 세계에의 개방성이라는 특성과 결부된다. 즉 현존재는 세계를 개방성(Offenheit) 속에서 출발하여 마주하고 사유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이러한 세계에 속함과 동시에 세계에의 개방성이란 문제를, 한 로봇공학자의 기술적 설계에서 동일하게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간의 인공지능 연구가 기계와 세계간의 인터페이스를 다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수준에 집중시켰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로드니 브룩스(R. Brooks)는 물리적 세계의 현실에 충실한 인공지능 개발을 제안한다. 그는 로봇설계의 2가지 근본 원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상황속에 놓임’과 ‘구현’이 그것이다.

1)상황 속에 놓인 로봇은 세계 안에 포함되어 있고, 추상적 기술이 아니라 그 피조물의 행동에 직접 영향을 주는, 지금, 여기 있는 세상을 그것의 센서를 통해 다룬다.

2)구현된 로봇은 물리적 몸을 지니고, 최소한 부분적으로 그 신체에 대한 세상의 영향을 통해 직접적으로 세상을 경험한다.

즉 그는 ‘지금, 여기 있는 세상’을 다루는 ‘세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 로봇, 물리적 몸으로 세상이 그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세상을 직접 경험하는 로봇 개발을 제안한다. 그런 식으로 물리적 신체를 갖는 브룩스의 로봇은 현실 세계와 어떤 이론적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아주 단순한 몇 개의 센서만을 장착한 이 로봇은 중앙시스템의 계산이나 추론의 연쇄 없이 센서를 통해 세계를 탐색하고 그때마다의 환경에 맞춰 목적을 수행한다. 이로써 ‘생각하지 않는 활동, 지각과 행동의 직접적 연결에 기초한’ 로봇이 탄생한다. 어떤 중앙시스템에서 가공하는 표상없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 세계를 유일한 자신의 모델로 사용해 브룩스의 로봇은 세계에 전적으로 열려있을 것을 요청받게 되는 것이다.

 

2.2 브룩스의 표상없는 지능 혹은 하이데거의 표상없는 사유

여기서 브룩스가 제안하는 로봇이 어떤 추상적 ‘표상없이’ 지금 여기의 세계를 자신의 유일한 행동 모델의 기전으로 사용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1991년을 기준으로 인공지능 개발에 있어서 지난 25년간의 일종의 후퇴에 직면한 후, 브룩스는 이제 인공지능 개발은 인간지능에 대한 완벽한 복제보다는 지식, 자연어의 이해와 같은 보다 전문화된 하위 문제로 후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더욱이 인간수준의 지능의 복잡성은 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이에 그는 인공지능 개발의 다른 접근법을 제안한다.

AI의 초기 연구는 체스와 같은 게임 내지 대수학의 정리 증명과 같은 상징적 문제, 기하학적 문제에 집중되었고, 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를 완벽하고 명료하게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정작 매우 간단하다고 여겨지는 수준의 지능을 탐구해보면, 세계에 대한 표상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혹은 인공지능 초창기에 선택된 프로젝트들인 체스두기, 대학 미적분 강의에서 나올 적분 문제 해결하기, 수학의 정리 증명하기, 아주 복잡한 대수 문제 풀기 등은, 그의 재치있는 설명대로 모두 “아주 잘 교육받은 남성 과학자가 흥미로워 하는 것들”일 뿐이다. 그 자체가 수준높은 지능을 입증하는 것이라면 그 이하의 지능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포괄하여야 할 것이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미적분을 풀고 수학 정리를 멋지게 제출하더라도 AI는 여전히 커피잔과 의자를 시각적으로 구별하거나 두 발로 걸어다니기 같은 너댓살의 어린이가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들에는 무력했다. 그리고 이 점이 드러난 것은 80년대에서 와서 였다.

역으로 35억년 전의 단세포로부터 출발해서 1억 2천만년 전에 나타난 최초의 영장류, 그로부터 현생 인류의 모습을 갖게 된 250만년 전을 더듬어 보는 브룩스는, 인간에게 글쓰기와 같은 지적인 작업은 단 5천년전에 발명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현생인류의 진화 과정이 오랜 시간 집중한 것은 오히려 지적 능력의 계발이기보다 환경과 결부된 신체의 문제 해결 능력과 그것의 응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로써 그는 이성이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매우 단순한 반응 능력, 즉 주변 환경을 감지해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일 것임을 추론한다. 그가 사유의 연쇄와 추론적 표상을 제거하고 지각과 행동을 직접 연결시키는 과감한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이를 테면 알고리즘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실제 공간에 놓여있는 장애물의 고차원의 수학적 공간에 나타나는 방법에, 즉 그것을 표상하는 방법에 집중하는 동안, 그는 반대로 어디에 장애물이 없는지를 표상하길 택한다. 그런 식으로 로봇의 팔은 움직이기에 안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로써 그는 세계의 자세한 표상을 산출하느라 감당할 수 없는 계산을 해결하는데 치중하지 않고도, 곤충들이 하듯 장애물을 피하고 적에게서 도망가고 먹이와 짝을 찾으며 초당 1미터 이상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행동을 구현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이로써 그는 전통적으로 인공지능의 지능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완전히 빼버리는 ‘캄브리아기 탐험’의 시작을 결심한다. “만일 내적 세계 모델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이 어렵고 소모적이라면, 그 내적 모델을 없애버려라!”

하이데거도 ‘표상없는’ 사유에 적지 않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는 사유를 외적 대상에 대한 주체의 내적 표상이라고 보는 데카르트적 전통에 비판적이다. 내적 표상으로서 세계를 마주할 때, 그것은 대상(Gegenstand)이라는 말이 지시하듯 표상의 주체와 맞서(Gegen-) 서있는(stand) 방식, 즉 대립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에게 진정한 사물에 대한 인식(사물성에 대한 사유)이란 인간적 표상함에 대해 아무런 연관도 없는 그런 고찰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맞서있는 대상(Gegenstand)이기보다 자립(Selbstand)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사유이다. 그가 현대인의 신속하고도 값싼 방식의 사유, 즉 모든 것을 너무나 손쉽고 재빨리 알고자 하고 또 그렇게 알자마자 바로 그 순간에 자기가 안 것을 잊어버리는 ‘무-사유’ 내지 그러한 따져봄(Rechen)에 입각한 ‘계산적인 사유’의 반댓말로 ‘뒤따라-사유하는’ 방식으로 오랜 사색을 요구하는 ‘숙고적인 사유’를 구별하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그는 “숙고적인 사유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일면적으로 표상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며, 또 우리가 일방적으로 표상을 향해 나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즉 그에게 표상이란 그때마다의 대리적 개념으로 사태를 재빨리 치환시켜버림으로써 세계에의 몰두를 막고, 그에 대한 이해조차 가로막는 무-사유와 같다. 그로써 다시금 하이데거는 그러한 사색을 위해 표상없이 사유하기, 세계에의 열린 태도 취하기, 즉 세계로의 열려-있음이라는 개방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브룩스의 표상없음이 보다 효율적인 로봇의 행동을 위한 일종의 설계상의 전략이었다면, 하이데거의 그것은 보다 깊은 철학적 사색을 요청하기 위한 예비 과정 정도로 보인다. 실제로 브룩스는 자신의 접근 방식이 하이데거적인 영감과 특정한 유사성을 갖는다고 지적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순전히 공학적인 고려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표상없음은 여기서 결코 동일한 내포를 지닌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이데거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동시에 메를로-퐁티의 지각론을 조회하는 드레이퍼스의 논의에서 우리는 이 로봇공학자와 현상학자의 논의가 어떻게 기묘하게 중첩되는 지를 발견하게 된다.

 

2.3 표상없는 지능 혹은 메를로-퐁티의 심적표상 비판

표상없음을 다루는 드레이퍼스의 논문, 「표상없는 지능: 메를로-퐁티의 심적 표상 비판」(2002)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브룩스의 「표상없는 지능」(1991)에 대한 일종의 응답인 듯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 논문에서 브룩스에 대한 논의는 삼간다. 대신 나중에 그가 「하이데거 AI는 왜 실패하는가」(2007)에서 브룩스의 행동주의적 모델, 필 아그레(P. Agre)의 실용적 모델과 함께 데카르트의 내적 표상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을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접근법이라고 평하는 월터 프리만(W.J. Freeman)의 신경 역학적 모델을 집중적으로 고찰한다. 그럼에도 이 텍스트는 드레이퍼스가 사유하는 표상없음이 어떻게 신체와 불가결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를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여기서 그는 메를로-퐁티의 반-표상주의를 주제화한다.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표상없음에 대한 사유는 현상학 고유의 것이기 보다, 후설의 표상주의와 구별되는 메를로-퐁티의 지각론에서 두드러지는 것이다. 과거의 특정한 경험이 유사성에 기반해 불려나오는 방식으로 현재의 인식을 채워준다는 후설의 표상주의적 관점과 달리, 메를로-퐁티는 반-표상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후설의 표상주의가 한 사람의 경험을 주관의 심적 표상이자 그 지향적 내용으로 다룸으로써 지각 경험에서 초월론적 주관의 위치를 강조한다면, 메를로-퐁티의 반-표상주의는 신체에 중심적 위치를 부여한다. 즉 메를로-퐁티에게 학습이란 표상에 토대를 둔 지성작용을 통한 것이 아니라, 어떤 표상의 매개없이 신체적 차원에서 직접 다뤄지는 것이다.

특히 드레이퍼스는 메를로-퐁티의 ‘지향적 호(intentional arc, 이하 ‘지향 호’)’ 개념을 부각시킴으로써, 메를로-퐁티의 작업은 신체(body)와 세계가 연결되어있다(coupled)는 비-표상적인 방식을 제공한다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메를로-퐁티가 제안하는 행위자는 마음에 떠오른 표상에 따라서가 아니라 세계에서의 상황(situation in the world)의 요청에 따라 행위한다. 학습자가 경험을 통해 획득하는 것은 심적으로 표상된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상황이 세밀하게 차별화됨에 따라 그에게 현전하는 것(presented)이다. 그로써 어떤 상황이 행위자에게 하나의 반응을 분명하게 요구(solicit)하지 않거나 반응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지 못하면 그는 상황에 대한 차별화를 더욱 세분화시킨다. 가령 우리가 어떤 도시에서 길을 찾는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 도시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일종의 "앙금/침전물(sedimented)"이다. 메를로-퐁티는 이처럼 체화된 대처(embodied coping)와 지각된 세계 사이의 피드백 루프를 ‘지향 호’라고 칭한다. 그리고 이 ‘지향 호’ 개념으로부터 드레이퍼스는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인지 내지 학습이란 어떤 표상의 매개 없이 신체적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이뤄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 그것은 신체에 직접 새겨지는 경험의 앙금들이지, 내적 표상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에 대한 이해, 그것은 사유하는 영혼의 지식의 양식이기 보다 육체를 갖는 존재자의 존재의 양식이다.

 

2.4 브룩스의 행동주의적 모델에 대한 드레이퍼스의 비판

그렇다면 이와 관련해 그가 조회하는 브룩스의 로봇의 경우는 어떨까?

드레이퍼스는 「하이데거 AI는 왜 실패하는가」(2007)에서 브룩스의 접근방식이 하이데거의 비-표상주의적 접근을 수용하는 중요한 진전이었음을 인정한다. 가령 드레이퍼스는 1970년대에 현상학적 시각에 기반해 인공지능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선언할 때, 기계는 인간과 같은 욕구를 갖지 않는다는 점과 더불어 기계는 신체를 갖지 않고, 상황지어지지(situated)도 않는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그것을 구현한 것이 바로 브룩스의 작업이었다. 그런 점에서 드레이퍼스에게 오직 물리적 신체의 구현에만 집중한 브룩스의 로봇, 그로써 특정한 상황 속에 놓이는 그의 로봇은 분명 큰 진전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드레이퍼스는 브룩스의 로봇은 고정적 고립적 특성(fixed isolable features)을 갖는 환경에만 반응할 뿐 맥락이나 변화하는 중요성(context or changing significance)에는 반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구나 브룩스의 기계는 학습하지 않는다. 드레이퍼스가 보기에 그는 기계의 학습이라는 중요할 과제를 미래 연구자들의 몫으로 치부해버린다.

드레이퍼스에 따르면, 브룩스는 내적 표상을 포기한다는 점에서 옳지만, AI연구자들이 직면해야만 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지점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대처(coping)는 내적 표상으로부터 이해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브룩스의 경험적 모델에서와 같은 고정된 특성의 환경에 대한 반응만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상의 드레이퍼스의 두 가지 비판, 브룩스의 로봇은 ‘1)고정·고립된 환경에만 반응할 수 있다, 2)학습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상 하나의 문제로 수렴될 수 있는데, 이는 모두 행위자의 세계로의 열려있음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로봇이 고정·고립된 환경에만 적합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은 다른 유동적이고 개방된 환경에 취약하다는 의미이고, 그로써 어떤 학습에의 계기도 갖지 못한다는 뜻일 것이다. 특히 앞서 2.1절에서 제시된 브룩스의 로봇 설계의 두 가지 근본 원리(1)로봇은 지금 여기 있는 현실 세계를 센서를 통해 다룬다, 2)신체를 가진 로봇은 세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가 뜻했던 ‘지금 여기의 현실 세계’라는 것이 드레이퍼스의 지적처럼 단순히 고정·고립된 것이었는가를 점검하는 일은 중요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문제, 즉 열린 세계에서 브룩스 로봇의 한계 내지 가능성 점검으로 이동하게 된다.

 

3. ‘표상없음’은 어떻게 ‘세계형성’으로 나아가는가

 

3.1 고정·고립된 환경의 의미

언뜻 보기에 드레이퍼스의 비판에 브룩스는 할 말이 많을 것처럼 보인다. 브룩스는 애초에 주변 환경을 역동적으로 감지해 움직일 수 있는 행동 능력을 제외한 모든 기능을 로봇으로부터 과감하게 제거하는 방식으로,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조응하는 로봇 설계에 천착했기 때문이다. 그가 실전에서의 방법론의 중요한 원칙으로 로봇이 마주할 세계가 결코 실험을 위해 설계된 단순한 세계(simplified world)여선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반드시 인간이 거주하는 현실 세계의 그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단순한 실험 공간에서 시작해 점차 광범위하게 환경의 복잡도를 높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에 노출되어야 하는 로봇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브룩스의 행동주의적 모델에서 ‘지금 여기의 현실 세계’란 엄격하게 말 그대로 그때그때마다 변화하기에 로봇이 매번 새롭게 센싱하고 대처해야 하는 환경과 조건이다. 로봇은 오직 세계만을 자신의 모델로 사용한다. 비록 그것이 상세한 계산에 의해 완벽하고 정교하게 구현된 세계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브룩스의 로봇이 쥐고 있는 지도는 정확히 측량된 보급형 지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직 한 순간만을 담아내는 한 장의 이미지와 같은 지도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그때마다 새로 그리는 지도이기에 실시간적으로 업데이트 된다. 바로 그 지도를 들고 있기에 브룩스의 로봇은 이미 주어진 표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새로운 장애물의 출현을 바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세계의 특정한 상황 안에 자신이 놓여있는 바를 매번 조정한다.

그렇다면 드레이퍼스는 너무나 부당한 동시에 명백히 브룩스가 겨냥한 바와 어긋나는 잘못된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앞서 드레이퍼스가 1970년대에 인공지능을 비관적으로 진단한 세 가지 연유를 다시 참조하자. 당시 그는 로봇은 신체가 없고, 그로써 상황속에 놓여지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인간과 같은 욕구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불가능한 기획이라고 진단했다. 그래서 그는 “지능형 컴퓨터를 향한 현재의 요청과 희망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는 이가 달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과 같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만약 21세기의 우리가 여전히 이러한 그의 냉소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기계는 욕구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명료하게 해결되지 못한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혹은 기술적 한계가 아니더라도 기술 발전의 궤적이 특정한 사회적 배경 안에서 찾아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욕구를 가진 기계를 우리가 원치 않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룩스의 로봇이 욕구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우리의 주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물음은 드레이퍼스가 그런 주제, 즉 욕구의 문제로 브룩스 로봇을 침수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로부터 기인한다.

앞서 드레이퍼스는 브룩스의 로봇이 고정·고립된 환경에만 반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의 이어지는 논의는 그와 반대로 인간과 같은 체화된 존재자들은 자신의 필요, 흥미,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세계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방식으로 반응한다는 지적으로 이동한다. 그에 따르면 특정한 필요와 흥미, 신체적 능력을 갖는 우리 인간은 그에 맞춰 세계에 자신을 개방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브룩스의 행동주의적 모델이 가정하는 것과 같은 어떤 반사적인 행동과도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드레이퍼스의 비판은 브룩스의 로봇이 아무리 물리적 신체를 갖고 세계의 상황 속에 놓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세계와 마주하는 방식은 반사적인 행동일 뿐, 인간의 욕구에 기반한 스스로를 개방함과 같은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드레퍼스가 브룩스의 로봇은 오직 고정·고립된 환경에만 반응한다고 지적할 때, 그 비판의 요지는 단순히 로봇이 마주하는 물리적인 공간이 특정한 영역으로 국한되어 있다든지, 그 환경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고 가정된다든지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드레이퍼스는 브룩스의 로봇이 어떻게 실시간으로 있다가 사라지고 하는 장애물의 출현에 유능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 로봇은 고정된 매핑에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실시간의 센싱을 따라서만 그렇게 한다. 그럼에도 드레이퍼스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다. 즉 세계의 상황 속에 놓인 행위자가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그 세계에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드레이퍼스가 말하는 필요와 욕구에 따라 그 세계에 자신을 개방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에 따르면 로봇은 어떤 상황을 인지하고 맥락화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상황 속에 놓일 수 없다. 특정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상황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로봇에 다 주입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한의 작업이기에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비춰본다면, 드레이퍼스는 여기서 자신을 개방함이라는 말로써, 그처럼 상황을 맥락화하고 중요성을 파악하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을 지시하고자 하는 것일 게다. 오직 인간만이 그처럼 개방된 환경(open-structured) 속에서 일상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가 이해하는 브룩스 로봇의 방식처럼, 반사적인 반응으로만 세계를 대한다면 그것은 고립되고 고정된 세계 속에 놓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적일 것이다.

 

3.2 반사적 행동과 세계로의 개방성

브룩스의 로봇이 취하는 모든 행동과 그 작동양상이 특정한 맥락화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반사적 행위일 뿐이라는 드레이퍼스의 지적은 옳다. 적어도 바로 그 지점, 그리니까 동물이 마주하는 환경에 대처하는 반사적 행위 방식을 브룩스는 로봇 설계의 중요한 기전으로 사용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가령 브룩스가 스스로 만든 가장 만족스러운 로봇으로 꼽는 징기스(Genghis)는 열을 방출하는 포유동물의 현존을 감지하고 그 쪽으로 향하는 곤충의 행동 방식을 차용한다. 징기스는 한 걸음을 떼는 데 몇 초씩 걸리는 이족 보행 대신 꼬리를 끌며 여섯 개의 다리로 기어올라가는 방식으로 신속히 이동한다. 사용자가 징기스의 행동에 개입하는 지점은 오직 전원을 끄고 킬 때 뿐이다. 전원이 켜지면 징기스는 적외선의 원천을 기다렸다가 그것이 포착되자마자 그 쪽으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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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스가 “인간의 변덕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것의 의지에 따라 목표물을 쫓고 그 위로 기어올라간다”고 보고하는 이 로봇은 그가 처한 상황 전체를 ‘맥락화’함으로써 계산하고 이해하고 판단해 행동하지 않는다. 마치 욕구를 갖는 살아있는 피조물이 유사한 상황에서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그에 정향된 행동을 하듯, 징기스는 자신의 IR 센서로 포착된 적외선을 목표물로 상정하고 어떤 사용자의 조종없이 그 쪽으로 직진해 간다. 52개의 유한상태 기계는 그 길목에서 그가 마주할 장애물들과 문턱들을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징기스의 사례는 상황 속에 놓여있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상황의 전체를 조망하는 맥락화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인간의 욕구에 따른 행위가 징기스의 적외선에 따른 행위와 동형적일 수 있는 것은 그 결과 이 둘은 모두 세계에로 자신을 개방하는 방식으로, 즉 세계를 자신의 필요와 요구에 적합한 방식으로 마주하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3.3 세계에로의 열려있음이라는 존재의 요청

이로써 우리는 브룩스가 제안하는 행동주의적 모델에 입각한 로봇이 신체를 갖는 동시에 그 신체를 갖고 자신의 고유한 목표물에 따라 세계를 탐색하도록 요구받는다는 점에서 상황 속에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로 개방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바꿔 말하면 브룩스의 로봇은 로봇이 단순히 세계 안에 처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세계 내에 처해있음을 인식하고, 바로 그로부터 자신의 목전의 행동을 판단하고 실제로 그처럼 행위한다는 점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로써 우리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이제 우리는 브룩스의 로봇이 드레이퍼스의 부당한 비판과 달리 세계에로 열려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에 로봇은 인간 고유의 영역, 즉 세계에로 열려있기에 자신의 세계 속에 있음을 인식하고 그로써 세계를 형성한다는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앞선 하이데거의 구분에 따르자면 이제 로봇은 세계없음의 무기물과도, ‘세계빈곤의 동물과도 구분되는 세계형성의 인간으로 어떤 위상의 격변을 겪게 된 것일까?

앞서 우리의 논의의 출발이 인간과 인공지능 각자의 고유한 개별성의 본질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기댐과 상호얽힘의 방식으로 세계 내에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였다는 점을 상기하자. 때문에 철학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로봇의 급작스러운 지위 변경을 선언하는 것이 이 논의의 목표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물음은 아주 단순한 작동기전만으로도 훌륭한 생존능력을 보여주는 곤충을 모방하려는 한 로봇공학자의 시도가 드러내는 세계 내의 존재자들의 세계이해에 대한 방식이고, 나아가 그런 방식을 통해 각각의 존재자들은 어떻게 함께 있게 되는가를 드러내는 데 있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한다면, 모든 존재자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세계에로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대개는 개방된지도 모르고 자신을 개방한다. 무기물의 세계없음보다는 상황이 좀 더 나은 동물도 다른 존재자들을 먹고 자신이 또한 먹히는 방식으로 상호성을 유지하지만(그는 이것을 댓거리(Benehmen) 내지 맞댓거리(Sichbenehmen)라고 표현한다) 어떤 반성도 없이 그렇게 하기에 얼빠져 있음(Benommenheit)’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현존재가 독자적인 위상을 부여받는 것은 이 대목에서다. 자신의 개방되어 있음을 인간은 알아차리고 숙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유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사유, 그렇기에 모든 표상이 제거된 자리에서 온전히 그 개방되는 것들이 드러나는 자리에 선 채, 참을성 있게 오래도록 숙고하는 자로서 남을 수 있는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사유를 요구한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그러한 숙고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갖지만 실제로 모든 인간이 그를 실행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철학 전체를 통틀어 우리 현존재에게 요청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에게만 허용된 가능성을 실현하라는 진심어린 외침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해본다면 어떨까. 하이데거가 댓거리의 예로 드는 것들은 보면 그것은 생각처럼 얼빠진것일 수 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는 지렁이가 두더지 앞을 피해 지나가고 개가 파리를 획 잡아채는 예를 떠올린다. 그러나 지렁이가 두더지를 피해 지나갈 때, 그리고 다시 그 피해 지나가는 지렁이를 두더지가 뒤쫓을 때, 그 피해 지나감과 뒤쫓음 사이에서 그들은 정말 얼빠져있는 것일까? 물론 하이데거는 의식이 혼미하다는 의미에서, 즉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용어를 썼을 테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즉 이들의 먹고 먹히는 것이 실로 본능적이기에 우리는 그것이 무엇보다 집요한 긴장과 주의집중을 요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적에게서 도망치는 영양(羚羊)보다 더 세계를 똑바로 직시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가 또 어디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세계 안에 있음을 인식한다는 것, 그로써 세계에로 개방된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의식적·의지적 행위이기 이전에 이미-항상 벌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세계--존재로서의 존재물음이란 어떤 사유에의 요청이기 이전에 하이데거의 말대로 존재에의 요청이라는 것이 지시하고 있는 바에 더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하이데거가 전념하는 현존재의 세계 형성이라는 과제 역시 우리는 바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설계자가 입력한 목표물이든 유기적 생명체가 갖는 내생적인 생명의 추동이든, 로봇을 포함한 세계 속에 처한 모든 존재자들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에 따라 자신만의 정향지점에 따라 세계를 이해하고, 거기에 처한 자신의 상황을 포착한다. 그 모든 것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자는 세계 속에서 행위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 방식으로 세계를 형성한다.

우리는 로봇이 자신의 작업을 수행하는 데 인간을 한낱 장애물로 여기는데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혹은 그로써 자신의 우월한 위치를 다시금 확인받고 너그러운 미소를 띨 수도 있겠지만, 로봇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장애물로 여긴다. 인간이 때로 서로에게 한낱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열정적으로 관심을 쏟을 애정의 대상이 되기도 하듯, 로봇에게는 자신의 목표와 상황 그리고 조건에 따라 주변과 관계 맺는 그만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로봇은 세계 내에서 때로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방식으로 또 때로는 우호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함께 세계를 형성한다.

 

4. 나가며

우리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상호얽힘의 관계성에 주목하기 위해 이들이 동일하게 처해있는 ‘세계’라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한편의 철학자 드레이퍼스는 컴퓨터는 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점점 더 길게 추가하면서, 인공지능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현존재의 자리를 수호하려고 애쓴다. 다른 한편의 공학자 브룩스는 일련의 복잡한 사유의 연쇄과정을 과감히 삭제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독자적인 영역을 건드리는 법 없이 오직 신체를 가짐으로써 상황 속에 놓여있는 로봇을 구현하는 데 몰두한다. 그리고 이 로봇공학자의 참신한 시도는 비-표상적인 방식으로 신체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인다는 점에서 드페이퍼스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이상의 기나긴 논쟁이, 그러나 실은 공학자는 결코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철학자의 고독한 논쟁이었던 그것이 시작된다. 애초에 순전한 공학적 고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독일 철학과의 연관성도 없다고 말하는 브룩스는 자신의 작업을 성실히 진행해갈 뿐이다. 반면 약 40년을 관통하는 오랜 성찰 끝에 2007년에 제출된 논문에서도 드레이퍼스의 입장은 처음과 일관된다. 그는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에 입각한 최근의 신체를 구현한 체화된 인공지능 모델의 성과가 여전히 인간의 것인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일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상의 논의는 이러한 기나긴 논쟁의 하나의 탈출구로서, 인간과 인공지능 각각의 고유성을 밝히고 혼란스럽게 엉켜버린 각자의 지위를 재정립하는 데 골몰하기보다, 상호가 엮여들어가 있는 형태를 세계로부터 도출해내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리고 그를 위해 우리는 브룩스와 드레이퍼스가 옳게 지적하듯, 세계 속에 있으면서 세계에로 자신을 개방한다는 것은 어떤 지적인 작업이기 이전에 신체의 문제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은 일체의 표상을 제거한다는 로봇공학자의 다분히 비주류적인 모험적 도전이었던 동시에, 한 현상학자의 세계를 마주하는 존재자들의 존재 방식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을 불러왔다.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고찰로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대단히 상이해보이는 두 지점, 그러니까 즉각적인 행위를 산출하는 로봇에게 주어지는 과제와 세계 안에 존재자들에게 부여되는 세계에로 열림이라는 요청이 세계 안에 있고 바로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위한다는 점으로 인해 상호 공명한다는 점이었다. 브룩스의 로봇을 포함한 세계 속에 있는 모든 존재자는 그러한 방식으로 함께 존재할 세계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 속에 있음이 표상없는 행동이자 신체를 통해 세계와 직접 연결된다는 것에 대한 이해를 필수적으로 요청하는 일종의 조건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세계 내에 거주하는 동시에 우리가 함께 사는 세계를 이미-항상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세계 형성이란 현존재 고유의 과제는 이제 모든 존재자들의 몫으로 되돌려진다. 로봇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과 더불어, 인간인 우리는 모두 우리의 세계를 함께 형성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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