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는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저희가 공부했던 내용들을 많은 부분 정리해주고 있고, 또 그것을 존재라는 개념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개체화의 결과로서 이해되는 시간과 존재자의 존재와 존재 그 자체 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의 시간과 개체화의 결과로서 만들어지는 구성적 시간이 있습니다. 칸트는 시간을 주체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시간은 주체가 무언가를 감각하고 지각하기 위해서 주체의 경험에 앞서 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은 경험에 선행하며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선험적인 형식이 됩니다. 이때 시간은 텅 빈 어떤 것, 어떤 내용도 담지 않는 순수 형식으로 이해됩니다.
반면 시간 역시 만들어지는 어떤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시간은 복수의 상이한 요소들이 종합된 하나의 결과물입니다. 복수의 요소들이 리듬적인 공조 속에서 하나처럼 움직일 때 이 공조 속에서 새로운 시간이 만들어집니다. 가령 각각의 악기들이 하나의 리듬 속에서 움직일 때 각각의 악기소리는 오케스트라라는 하나의 소리 속으로 말려 들어가게 됩니다. 이 리듬적 공조 속에서 오케스트라는 외부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시간을 만들어내게 되고, 리듬적 공조가 지속되는 한 오케스트라라는 하나의 개체화는 지속됩니다. 이때 시간은 각각의 소리들이 공조해서 만들어낸 동기화의 결과물이 됩니다. 시간은 만들어진 개체화가 지속되는 동안 존속되고 리듬적 공조를 멈추는 순간 그것과 결부된 시간 역시 중단되게 됩니다.
책에서 본 것처럼 신체 역시 신체를 이루는 복수의 요소들이 하나의 리듬 속에서 움직일 때 신체의 개체성이 유지됩니다. 개체의 시간 역시 개체화를 만들어내는 리듬적 공조가 유지되는 한에서 지속됩니다. 따라서 시간은 그것과 결부된 개체화의 결과로 만들어지고, 개체화가 지속되는 동안 유지되는 것이지 개체 바깥의 선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게 됩니다. 시간은 선행적 조건이 아니라 개체화의 결과입니다.
다음으로 존재자와 존재입니다. 존재자란 특정한 규정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책상, 외계인 등 존재자란 실제로 존재하는 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특정한 규정을 갖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반면 존재란 ‘있음’ 그 자체입니다. 존재는 다시 존재자의 존재와 존재 그 자체로 구별됩니다. 존재자의 존재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자의 존재란 존재자의 특정한 규정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대로 이해됩니다. 어떠한 존재자의 규정성도 존재 속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존재란 이 모든 존재자의 규정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존재자의 존재란 특정한 규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미규정성을 갖습니다. 모든 존재자의 규정성을 담고 있기에 거꾸로 어떤 규정성도 띠지 않는 것입니다. 이때 존재의 미규정성은 규정성이 없다는 의미에서 미규정적인 것이 아니라 규정성이 너무 많아서 없다라고 합니다.
존재자의 존재는 모든 규정성으로 가득 찬 미규정성이기에 어떠한 규정성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존재의 미규정성이 가진 이러한 규정가능성은 미규정적인 것들의 이웃관계, 혼합에서 발생합니다. 규정성으로 가득 찬 미규정적 존재는 특정한 규정으로 고정된 것(동일화된 것)이 아니기에 그 자체로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미규정적인 것들은 결합되어 규정가능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규정적 존재는 변화를 지속하는 것이고, 이런 변화의 지속이 곧 생성입니다. 존재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의 상태고 모든 규정성을 가진 채 흐르는 미규정성입니다. 또한 어떤 규정성으로도 현행화되지 않았기에 잠재적이라 할 수 있고, 반대로 존재자는 특정한 규정을 가진 것이기에 현행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자의 존재가 가지는 미규정성은 규정가능성과 그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완결된 규정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런 한에서 존재의 미규정성은 최소치의 규정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너무 작아 어떤 규정성도 가질 수 없는 것이지만 이웃한 것과의 결합에 따라 규정가능성을 가지는 미규정성입니다. 이런 최소치의 규정성을 가진 미규정자는 모든 존재자를 만들어내기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보편성을 갖습니다. 즉 존재자의 존재인 미규정자는 최소 크기의 규정성을 가진 dx, dy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흐르는 지속의 상태를 갖습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미규정자들의 특정한 결합관계를 이해하면 존재자에 대한 하나의 규정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장애나 박테리아는 이런 의미에서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미규정자들의 특정한 이웃관계를 표시합니다.
반면 존재 그 자체는 규정가능성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는 미규정성이 아닌 어떤 규정성도 없는 무규정적인 것입니다. 존재는 최소치의 규정성을 가진 dx, dy마저 용해되어 사라지는 무규정성을 갖습니다. 이러한 존재가 있어야 최소치의 규정성을 가진 미규정자 역시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 주는 드디어 마지막 강의입니다!
발제는 박찬유 선생님과 박신영 선생님입니다.
프로포절 발표는 우주, 희정, 진희, 연숙 선생님입니다~
책을 읽다 궁금한 점이나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으신 내용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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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신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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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온코마우스에서 동물들의 무의미한 죽음에 대해) 덧없고 비루함이 반드시 어떤 대상을 대하는 자가 느끼는 감정만은 아니다...벌거벗겨져 길거리에 내버려진 채 쓰레기가 된 시체는, 시체 자신이 느끼지 못한다 해도 충분히 비참하고, 누군가 보든 말든 충분히 처참하다...케이의 시체가 주는 감응이라는 점에서.... 케이 자신의 죽은 신체에 속한 것.
그러나 시체가 주는 감응은 시체 자체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자가 느끼는 것이 아닌가요? 사람은 버려진 시체를 비참하게 보지만, 파리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일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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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자란 작용하여 어떤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는 한에서만, 어떤 효과의 잠재성을 갖는 한에서만 존재한다.”(170)
“존재를 반드시 ‘소속’과 ‘포함’이라는 범주를 통해 다루어야 할 이유는 없다. 존재를 소속과 포함의 범주로 다루어야 한다면, 소속과 포함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306)
첫 문장을 이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존재자는 존재자의 효과인 양태로서 현존한다.” 그리고 “존재는 존재자로 표현한다.”
두 번째 문장은, 이탈하게 하는 존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원인으로서의 존재는 다른 원인으로서 현존하는 양태를 이탈시킨다고 이해해도 좋을까요?
만일 이렇게 이해하지 않으면 첫문장에서는 존재자는 존재의 결과일텐데, 두 번째 문장에서 존재자가 이탈할 수 있는 역능은 존재의 자기 부정이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2. “객관적 가능성으로서의 프로레타리아를 대중과 비교하자면,~ 객관적 가능성이란 ~ 구조적 분석에 의해 명확히 규정될 수 있는 ‘가능성’의 최대치다. 반면 비계급으로서의 대중이란~ 명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잠재적 ‘현실’이다.” (329)에서 가능성의 최대치의 예로 프로레타리아이외에 부르조아지 혹은 자본주의 체체 자체가 이런 가능성의 최대치로서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자본주의의 구성체 내 모든 사회 계급들은 가능성의 최대치를 누리기 위해 무한 경쟁하는 자본가들 아닐까? 프로레타리아와의 단절로서 대중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단절로서 대중이라고 말해되 되지 않을까요?
이럴 때 혁명은 자본주의의 부정이 아니라 실재하는 삶의 긍정, 창조하는 역능의 향유가 일차적이고 자본주의의 부정은 긍정에 수반되는 그림자라고 말해도 될까요?
3. 매혹의 수동성과 애벌레 자아의 수동성의 유사점과 차이는? 혹은 같은 의미인가요?
대항계급을 구성하는 조직의 작동방식에 대해서도 어떤 근본적 변환이 필요한 게 아닐까? 대중이 귀속의 절차를 통해 원소적 성격으로 환원되지 않고도 조직속으로 쉽게 들어가고, 꼭 탈소속의 절차없이도 쉽게 나올 수 있는, 그렇기에 '자격없는' 대중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조직. 대항 계급으로서, 권력의 장악과 지배를 포기하지 않는 경우에도, 지배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명시적 자격없이 대중인 채 대중으로서 작동할 수 있는 그런 조직. 그리하여 '지배할 자격 없음'이 지배할 자격이 되는 조직. 여기서 '지배할 자격없는 자들(데모스)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근원적 역설을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 -P340-
Q1> 철학적 사유의 세계에서는 위의 글들이 가능성으로 존재할 수 있으나 , 현실세계에서는 '아나키즘' 또는 '소시민의 정치학'이 되기 쉽다고 생각됩니다. 아나키즘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해석이 필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전지구적 경제-기계를 멈추거나 전환시키기 위해서 아나키즘은 지금껏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아나키즘은 항상 어떤 역할을 못하긴 했죠. 반면, 레닌의 당이론 -민주집중제나 노동계급의 대체자로서의 당 - 이 실패한 건 그들의 사유와 철학이 실패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현실의 문턱 인간의 문턱 그리고 자본주의에 포획된 개체의 문턱이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유가 현행화되어 인간사회에 투영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고 철학과는 별개의 영역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강의를 통해 알게된 '존재론적 평면화'의 사유가 반시대적이고 어긋남의 어떤 단서를 제공하긴 하지만 조직화를 하는 일 그리고 저항하는 일이 과연 이렇게 진행되어도 맞는가라는 의구심을 항상 갖게 합니다. 가령, 당이나 노동조합이 아니라면 어떤 형태의 조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