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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7장 우리의 덕과 8장 민족과 조국이었습니다. 7장은 의미가 모호한 것처럼 보이는 역사 감각과 여성에 관한 당황스러운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8장은 유럽화와 대비되는 민족과 조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먼저 여성에 관한 니체의 비판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여성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보다 여성이 가진 생산에 있습니다. 반대로 학문은 남성에 고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니체는 여성과 남성을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니체가 보기에 여성이 남성의 가치를 좇는 것은(예를 들어 학문을 하는 것) 오히려 여성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됩니다. 즉 여성 자신의 본능적 힘과 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성적 동질화로 인해 여성의 능력이 약화되는 것이 됩니다.

니체는 특히 여성이 학문을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니체가 보기에 학문이란 자신만의 확실성으로 가면 뒤의 얼굴을 밝히려고 하는 남성적인 것에 해당합니다. 반면 여성의 특징 중 하나는 가장에 있습니다. 니체는 꾸밈을 여성의 것으로 여기면서 계속해서 자신을 새롭게 보여주는 가면을 긍정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여성으로 간주되기도 하며 그렇기 때문에 학문은 여성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런 니체가 보기에 계몽의 이름으로 여성을 교육하는 것은 학문의 획득이 아닌 여성적 가치의 상실이 되는 것입니다.

적잖이 당황스러운 니체의 여성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강한 비판은 7장 후반부 내내 이어집니다. 니체는 여성을 비판하면서 이는 자신의 밑바닥에 있는 ‘신념’이고, 더불어 이는 자신만의 ‘진리’이니 이해해달라는 변명까지 덧붙입니다. 여성에 대한 이런 비판은 망치를 든 니체마저 넘어서기 힘들었던 시대적 한계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비판하기 위해 읽는 것만큼 허망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더불어 어떤 것이든 그것이 가진 퍼스펙티브를 활용하려는 니체 자신의 철학적 방법을 더 엄밀히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러한 편견 속에서도 의미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분명 니체는 여성과 남성을 그 신체적 특징 혹은 속성으로 환원해서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 남녀의 신체적 특징이 어떤 담론이나 이론으로도 어쩔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적 가치를 좇는 것은 자신의 생리학적이고 신체적인 특징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비판됩니다. 니체에게 남성적 가치는 여성적 가치로, 여성적 가치는 남성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적 가치와 남성적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적 가치와 여성적 가치를 신체적인 특징이나 어떠한 속성(학문/가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수적인 가치와 소수적인 가치로 본다면 니체의 여성 비판은 새롭게 독해될 수 있습니다. 가령 여기서 남성적 가치는 다수적인 가치입니다. 현재의 지배적인 가치 척도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반면 여성적 가치라고 불리는 것은 소수적 가치입니다. 현재의 지배적인 남성적인 가치 척도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가치를 여성적인 가치로 부른다면 니체의 두 구별은 유의미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임(be)’과 ‘~됨(become, becoming)’을 구별하면서 ~임을 현재의 다수적 상태로 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시대의 다수적인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이미 남성‘입니다.’ 여성조차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도 남성도 언제나 이미-남성입니다. 반면 ‘~됨’ 혹은 ‘-되기’는 이러한 지배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천의 고원』에서 ‘-되기’는 언제나 여성-되기이며 또한 아이-되기라는 말을 합니다. 이전의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가치의 생성, 소수성이란 이처럼 어떤 특징과 반대되는 특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니체가 남성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성을 말할 때 이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신랄한 비판 속에서도 어떤 것을 얻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으로는 역사 감각입니다. 7장에 나온 역사 감각은 8장 민족과 조국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7장에서 니체가 명시적으로 비판하는 역사 감각과 달리 8장에서 민족과 조국을 비판할 때에는 반대로 역사 감각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니체를 ‘엄밀’하게 독해한다면 우리는 역사 감각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당대의 역사 감각이란 그 말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유럽이 신분이나 인종의 민족주의적 혼합으로 추락해버린 매혹적이고 광적인 반야만 상태의 결과로 우리에게 오게 된 것입니다.” 뒤이어 “역사적 감각이라는 우리의 커다란 덕은 좋은 취미와 적어도 최상의 취미와 필연적으로 대립되는 것이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말들만 놓고 보면 역사적 감각이란 유럽 안의 여러 신분과 인종이 뒤섞이면서 취미와 미각이 혼합되어 어떠한 것이든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잡종성으로 치부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같은 절에서 이러한 역사적 감각으로 인해 유럽인들은 호메로스와 같은 작품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여러 미감이 뒤섞이는 덕분에 이전에 하나의 미감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작품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니체 식으로 다시 말하면 여러 퍼스펙티브들이 뒤섞이면서, 또한 그런 퍼스펙티브들을 횡단하게 됨으로써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분명 니체에게는 긍정할만한 것이고 또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역사 감각이란 고귀하지 못하다고 일차적으로 비판하면서도 그것이 ‘매혹적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7장에서 이처럼 모호하게 언급된 역사 감각은 8장 민족과 조국의 서술에서는 긍정되고 있습니다. 민족과 조국에서 니체는 여러 음악가들을 예로 들면서 유럽화와 민족주의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음악은 무엇보다 전 유럽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낭만주의 음악으로 넘어오면서 민족성이 강조되고 이전의 유럽적인 음악은 민족적인 것으로 국한되고 맙니다. 이는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과 그에 대항해 각 나라들이 민족 국가로 결합하는 것과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민족화, 조국화를 비판합니다. 그 이유는 유럽이 각각의 나라로 민족화하면서 이전에 다양했던 퍼스펙티브들은 하나의 것으로 단일화되고 다른 퍼스펙티브를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민족주의를 7장에서 말한 역사적 감각과 대비되는 ‘망상’으로 표현합니다. 이미 유럽은 여러 감각이 뒤섞인 역사 감각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와 반대되는 민족주의는 유럽인들의 감각과는 맞지 않는 헛된 추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이라는 나라는 언제나 ‘어제’와 ‘내일’만 있는 것이지 결코 ‘오늘’인 현재는 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니체는 여기서 바그너와 나폴레옹의 예를 들면서 역사 감각을 긍정합니다. 먼저 니체에게 나폴레옹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전제적 지배자’, ‘초인’입니다. 그가 유럽을 정복하는 것은 이런 민족주의의 편협함을 깨부수는 활동으로 그려집니다. 니체에게 유럽의 단일화는 정말 ‘하나’의 유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퍼스펙티브들이 섞이는 역사 감각의 형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유럽은 그러한 상이하고 이질적인 퍼스펙티브들을 엮어주는 하나의 일관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폴레옹마저 민족주의에 빠지게 되었을 때는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에도 초인이랑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그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청년 바그너는 유럽의 여러 퍼스펙티브들을 넘나들며 새로운 것을 창조했습니다. 그가 가장 창조적인 시기에 독일이 아닌 파리에 그 본능이 더 가까웠다는 언급을 보면, 청년 바그너 역시 또 하나의 초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청년 바그너는 낭만주의의 시대에 반낭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반시대적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그너도 말년에 종교적이고 민족주의에 가까워지면서부터는 명시적으로 니체의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말년의 바그너는 독일이라는 민족에 갇혀버린 그제의 인간이며 동시에 모레의 인간으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 감각이란 단순한 잡종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가치의 발명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감각이 됩니다. 역사 감각에서 받아들여야할 것은 무엇보다 상이한 퍼스펙티브들을 넘나들며, 각각의 퍼스펙티브가 보고자하는 것을 나의 퍼스펙티브로 활용하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

이번주는 드디어 선악의 저편 마지막 9장입니다.
막막했던 것처럼 보였던 니체의 책도 어느덧 마지막 장에 왔습니다. 
더불어 이번주에는 다음주에 있을 에세이 프로포절도 함께 이야기합니다. 
모두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강하게 남는 것들이 하나쯤은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에세이의 방향을 써와 함께 이야기해보면 각자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9장 발제는 시체선생님입니다. 
궁금하신 점이나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으신 내용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됩니다 
그럼 토욜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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