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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발제] 우상의 황혼① :: 10.5(월)

정웅빈 2020.10.06 16:48 조회 수 : 136

우상의 황혼 (또는 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

2020.10.5. 정 웅 빈

 

[1] ‘영원한 우상’의 전형으로서 소크라테스 (87p)

  소크라테스가 임종의 자리에서 말했다: “삶-이것은 오랫동안 병들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네 : 나는 구원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약과 의술의 신으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람들이 병이 나으면 감사의 뜻으로 닭을 한 마리씩 바쳤다고 한다. 따라서 니체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통해, 소크라테스 스스로가 삶을 하나의 병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있어서 현인으로 알려진 자들은 이처럼 삶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여 왔다. 따라서 니체는 반대로 이러한 “현인들의 의견일치”가 진리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두 생명력이 퇴화된, 생리적으로 몰락하는 유형의 인간인 데카당스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삶에 대한 가치 평가의 문제를,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것으로,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단지 참과 거짓의 문제가 될 수 없을뿐만 아니라, 하나의 생리적 징후이자 가장 개별적이고 고유한 하나의 관점(광학)임을 주장한다. 인간이 삶을 평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삶의 바깥”에서 인간의 삶들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만 하고, 그러한 삶들을 각각 비교할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인간은 “논의의 대상이지 판결자”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인 판단은 지혜의 결과가 아니라 그들의 생리적 상태가 쇠약해졌기 때문에 나타난 “회의와 우울, 삶에 대한 피로감, 삶에 대한 적개심”에 의한 결과물인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삶이 하나의 병인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하나의 병적인 상태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2]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산파술과 반어법) 비판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은 “적수의 지성을 피로하게 만들어버리는(상대방의 지성에서 힘을 제거해버리는)” 하나의 무기이고 권력의 수단이다. 그는 이러한 무기를 통해 상대방을 압도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그의 반어법을 통해 그리스인들의 투쟁과 경쟁 충동을 자극해 그들을 매혹시켜버렸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은, 즉 이성을 폭군으로 만들어 자신의 본능을 지배하는 것은 본능의 무정부 상태(이것은 데카당스에 대한 니체의 또 다른 정의이다)에 대한 치료법이었다. “논리적인 것의 이상과다”, “정신의 괴물상태”, 소크라테스의 합리성은 그리스 사회에서도 하나의 구세주로 여겨졌고, 그러한 이성이 곧 미덕이고 행복이라는 등식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열광은, 그들이 처한 위험한 상황을 곧 반증하는 것이다. “이미 옛 아테네가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그들은 본능과 맞서 싸우기 위해 ‘이성’을 주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도덕뿐만 아니라, 개선의 도덕,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경우와 같이 본능이 결여되고, 본능과 맞서 싸우고자 하는 도덕은 모두 하나의 데카당스 도덕이다. 반대로 상승하는 삶에서는 “행복은 본능과 같은 것이다.”

 

[3] 철학자들의 미라와 같은 삶 (96p)

  철학자들의 존재, 영원성, 진리, 불변, 영혼, 신과 같은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믿음은 감각과 육체, 그리고 생성과 변화에 대한 증오를 낳았다. 그들은 “생식과 성장, 그리고 죽음, 변화, 노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었고, 존재를, 세계의 참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감각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감각과 육체를 부정하고 미라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각을 통해 얻은 재료를 가지고서 통일성, 사물, 실체, 지속과 같은 거짓말을 만들어 낸 것은 우리의 이성이다. 즉 이성이야말로 그러한 감각을 거짓된 것으로 만드는 존재로, ‘존재’야 말로 “공허한 허구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생성과 소멸과 변화를 보여주는 한, 감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최초의 것과 최후의 것을 혼동함으로써, 즉 감각의 증거들을 통해 만들어낸 공허한 개념들을, 가장 최초의 것으로 위치시킨다. “존재자, 무조건적인 것, 선, 진리, 완전”과 같은 최상의 개념들은 무언가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영원에서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개념들로 여겨진다. 그리고 비로소 ‘신’이라는 가장 공허하고 가장 최후에 나타난 개념이, 가장 실재적이며 가장 최초의 개념으로,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철학자들이 최초의 것과 최후의 것을 혼동함으로써 인류는 어떠한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었는가?

 

[4] 문법의 오류

  “나는 생각한다.”, “맹금이 공격한다.”, “번개가 친다.” 와 같이, 주어 뒤에 항상 서술어를 함께 서술하는 인간의 언어적 습관은, 이성으로 하여금 행위와 행위자에 대한 믿음을 형성하게 한다. 행위자의 행위가 가능한 이유는 그러한 행위자가, 행위를 하거나/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지를 가진 나로부터 ‘존재’외 ‘실체’라는 개념이 나온다. 실체로서의 나, 존재로서의 나는 이제 모든 사물에 대해 ‘실체’, ‘존재’라는 개념을 투영한다. 그리고 비로소 영원불변하는 실체, 완전한 자유의지를 지닌 이성적 존재로서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믿음까지 나가간다. 인간의 이성은 감각적 육체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연원하는 것이다.

 

[5] 니체의 요약

1) 실재성은 오직 감각의 증거들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2) 철학자들의 참된 세계는 “비존재”, “무無”와도 같은 것이다.

3) 철학자들이 가상의 세계를 꾸며내는 것은 현실 세계에 대한 복수와도 같은 것으로, 삶(생성과 소멸)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다.

4) 형이상학자들의 참된 세계는 생성, 소멸하는 삶을 부정하는 것인 반면에 위대한 예술가의 가상(작품)은 오히려 생성, 소멸하는 삶을 선택하고, 강조하며, 그것을 미적으로 긍정하기 위한 것이다.

 

[6] 반자연으로서의 도덕 (105p)

  그리스도교 도덕은 인간의 열정, 본능, 의지를 “거세” 하려고만 한다는 점에서 반자연적이고, 삶 자체를 부정하는 도덕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교회의 계율은 “감성, 긍지, 권력욕, 소유욕, 복수욕”과 같은 정념을 뿌리째 뽑아 없애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교회의 이러한 처치 방식은 “치아의 통증을 없애기 위해 치아를 뽑아버리는 치과의사”의 처치법과도 같은 것이다. 교회는 정념을 정신적이고 어떻게 보다 생산적인 것으로, 아름답고 강하며 통일된 것으로 승화시켜낼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사실 교회의 그러한 치료법은 그들이 더 이상 그러한 정념에 맞서 싸울만한 강한 의지가 없기 때문에 나타난, 필연적 결과로써의 해결책이며, 역사적으로 보아도 신상수훈에 나타난 그들의 관능에 대한 증오는 금욕주의자들이 아니라 “금욕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었지만 될 수 없었던” 의지가 약화되고 퇴락한 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적의의 정신화’는 적을 갖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는데 근거한다. 정치 영역에서는 당파의 자기 보존을 위해서는 반대당파의 힘의 유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인간 영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의지들의 대립과 긴장은 우리를 젊은 존재로 유지시키고, 무엇인가 결실을 맺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싸움의 포기는 위대한 삶의 포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단지 “영혼의 평화”만을 꿈꾸며, 이는 그저 동물적 본능의 만족, 피로의 시작, 순조로운 소화(신진대사), 정열의 순간적인 만족, 의지의 약화, 게으름, 허영, 미래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또는 모든 우상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한 개인이 달라지길 원하는 도덕은 사실 이 세계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은 세계 전체가 만들어낸 하나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러한 각 개인은 “미래와 과거로부터의 운명이며, 앞으로 도래할 것과 앞으로 될 모든 것에 대한 또 하나의 법칙, 또 하나의 필연성인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달라지길 원하는 것은 세계 전체가 달라지길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성직자와 병든 이성의 배척과 부정이 아니라, 그러한 성직자나 병든 유형의 인간들에게서도 유익한 점을 포착해낼 수 있는 긍정의 경제학인 것이다.

 

[7] 오류의 역사. 어떻게 '참된 세계'가 마침내 우화가 되었는가? (103p)  

1. 참된 세계는 덕 있는 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세계)

2. 참된 세계는 이제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이며, 오직 현명하고 경건하며 덕 있는 자, 그리고 “회개하는 죄인”에게만 약속된 세계이다. (그리스도교의 천국)

3. 참된 세계는 이제 도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증명도 불가능한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세계는 위안(희망)이 되는 세계이고 의무와 명령을 내리는 세계이다. (칸트의 도덕시대)

4. 참된 세계가 도달할 수도 감각할 수도 없는 세계라면, 더 이상 의무와 같은 아무런 효력도 발생하지 않는다. (실증주의의 시대.)

5. ‘참된 세계’라는 관념 자체가 이제는 쓸모없는 것으로, 제거된다.

6. 참된 세계가 사라지는 순간 남은 것은 참된 세계의 반대로서 가상 세계가 아니라, 생성, 변화, 소멸만이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 세계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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