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당스의 범주가 있는가? 데카당스가 무엇인가?
나는 데카당스를 내 삶에서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모든 것이라 표현하고 싶다. 니체는 우선 우리는 바그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바그너는 데카당스이고 현대적이라 했다.
니체의 데카당스는 바그너였다. 나에게 소화 불량을 일으키는 존재. 무지에 머물게 하는 존재들.
데카당스는 선악이 없다. 데카당스를 악으로 보고 없애야만 하는 부정이 아니다. 데카당스는 내가 싸워야 대상이며 나를 강하게 하는 전우이다. 검투사는 적이 있어야 단련하며 강해진다.
선과악의 개념을 넘어 이념의 차이로 규범하였을때 우리가 대립하는 존재는 관점의 차이가 되는 것이고 사상의 차이로 옮겨가게 된다.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없애야 할 존재에서 차이가 있는 존재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내가 이해되지 않는 것을 이해하고자 할때 그때 소화불량이 생긴다.
불편한 것이 없었는데 무엇가를 이해하고자 하였을 때, 무엇가를 소화하고자 하였을 때 거북한게 내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속이 거북하게 되었을 때 소화를 위해 점액(위액)이 나온다. 하지만 소화에 불편을 느끼며 내 신체가 병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내 병든 위장은 점액을 조절하지 못해 쓰리거나, 답답해하며 위장병을 앓는 시간을 겯뎌내야 이해되지 않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점액이 조절되고 내 장으로 흡수되며 더 강한 신체가 되어 가는 것이다.
튼튼한 장을 갖기위해서는 충실하여야 한다. 나는 그동안 성실하였지만 충실하지는 못했다.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동안 책을 읽어내는 시간을 반복하며 내가 단련되길 기대했다.
하지만 거북한 것에 충실하지 못한 시간은 점액을 조절하기엔 충분치 않다. 장기를 단련하기엔 충분치 못한 것이다. 시간의 강도를 높여 끈질기게 탐구하여야 충실할 수 있다. 끈질기게 질문하며 집중하는 순간, 그 몰입한 순간만이 시간의 강도가 짙어진다.
충실하기 위해 우리는 전우를 사랑하여야 한다. 사랑하기에 전쟁터를 머물며 끈질기에 전우를 파악하고 해석하며 이해도를 높여 가며 싸운다.
니체는 바그너를 사랑하지만 데카당스로써 소화시켜내야 하는 존재였다. 니체는 사랑하기에 바그너를 소화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존재란 피하지 못하고 싸워야하는 애증의 존재, 묶여버린 존재. 어릴적 끊임없이 싸우고 상처입으면서 증오하고 이해되지 않는 형제처럼 나에게 소화되지 않는 존재이다.
형제를 사랑하기에 형제에게 충실하고 소화하고자 몰입한다. 이해되지 않는 형제의 행동은 수수께기가 되고 나는 사랑하기에 그것을 풀어낼려고 거북한 시간을 힘겹게 겯뎌내고 단련한다. 단련을 통해 얻은 튼튼한 장으로 인해 소화된 형제는 여전히 거북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내게 괴로움을 다가오지 않는다. 그는 나를 성장시켰고 내 장기를 튼튼하게 만드는 데카당스가 되어준 것이다.
이제야 니체가 한 말이 이해가 된다. '내 글은 가까이에서 보았을 땐 데카당스지만 멀리서 보면 어머니의 글이다.' 나를 단련하기 위해 니체의 글에 충실하게 읽으며 단련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 단련이 끝났을 때 생성을 할 수 있게 된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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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의 짐작
오라클님 댓글은 잘 읽었습니다^^
오라클님과 제 견해를 댓글을 남겨 봅니다.
이성과 신체를 저는 하나로 봅니다. 스포노자 때 공부하였던 것처럼 신체와 이성은 분리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봅니다.
그래서 신체의 코나투스가 약해지면 이성의 코나투스로 함께 약하지는 것이고 반대도 가능합니다.
저는 니체도 스피로자처럼 신체와 이성을 하나로 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니체도 책에 중간 중간 신체를 강조하는 글을 쓴거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우상의 황혼' 34번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고요.
앉아 있을 때만 생각하고 쓸 수 있다(플로베르G. Flaubert).35)—이로써 나는 너, 허무주의자를 잡았다! 꾹 눌러앉아 있는 끈기야말로 성스러운 정신을 거스르는 죄이다. 걸으면서 얻은 생각만이 가치 있다.
바그너는 내 신체와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니체 대 바그너] 내가 반박하는 곳
니체는 바그너음악에 대한 자신의 반박이 이성적 반박이 아니라, 생리적 반박이라고 합니다. 바그너는 내 견해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신체와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거지요. "어떤 음악이, 어떤 철학, 어떤 견해가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바그너음악에 대해 내 신체 전체가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생리적 거부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그것에 대해 이성적(논리적)이 아니라 신체적(삶)으로 맞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장식 축산'에 대해 이성적으로 반대하기는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우리신체가 반응하고, 삶으로서 응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니체가 말하는 생리적 반박이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바그너음악에 대한 내 반박은 생리적 반박이다. 왜 이런 생리적 반박이 먼저 미적 형식으로 위장하는가? 미학이란 것은 응용생리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음악이 내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나는 더 이상 편하게 숨쉬지 못한다. 내발이 곧장 그것에 분개하며 반항한다. 내 발은 박자와 춤과 행진을 필요로 하는데, 바그너의 황제행진곡은 독일의 젊은 황제(*바그너의 후원자, 루트비히2세. 바그너에게 바이로이트 출제와 바그너극장을 후원)라도 행진할 수 없다. 내 발은 음악에 훌륭한 걸음이나 발걸음이나 춤에서 느껴지는 황홀감을 요구한다. / 그런데 내 위도, 내 심장도, 내 혈액순환도 항의하고 있으며, 내 내장은 탄식하고 있고, 내 목소리도 돌연 쉬어버린다! 바그너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나는 안정제가 필요하다. / ...... 내 몸은 음악에 의해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 내 우울은 완전성에 몸을 숨기고 완전성의 심연에서 편히 쉬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나에게는 음악이 필요하다. 하지만 바그너는 병들게 한다."
철학적 가치는 생리적 상태의 표현이다. [힘에의 의지]
특히 니체가 [힘에의 의지]에서 현대 니힐리즘(허무적 가치)의 원인으로 데카당스(힘의 퇴화)를 지적할 때, 생리적 상태가 가치의 토양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데카당스(생리적 퇴화)가 니힐리즘(허무적 가치)이 성장하는 토양이다 :: #38. 니힐리즘 운동(*탈가치화)은 데카당스(*힘의 퇴화)의 표현이다. (*데카당스로부터 니힐리즘이 생겨난다) 니힐리즘 운동은 단순히 생리적 쇠퇴를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43. 니힐리즘은 절대로 (*데카당스의) 원인이 아니며, 단순히 데카당스(힘의 퇴화)의 논리적 결과이다. / #55. 모든 계급에 걸쳐서 가장 건강하지 않은 부류의 인간들이 니힐리즘이 성장하는 토양이다.
/ #39. (힘의 쇠퇴와 가치평가의 관계) (*힘의) 쇠퇴가 (*철학적) 가치평가의 형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 가치평가에서 쇠퇴가 지배적 역할을 하고 있다.
퇴화의 생리학:: 퇴화하는 삶은 퇴화하는 이상을 만들어낸다 :: #47. 나는 철학ㆍ도덕ㆍ종교의 최고가치들이 약한 자들이나 정신적으로 병든 자들, 신경쇠약에 걸린 자들의 가치들과 비교해보았다. 전자의 가치들도 후자의 사람들이 앓고 있는 병을 약한 형태로 앓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 #53. (쇠퇴의 생리학) 과학(학문)의 이상들까지 무의식적으로 쇠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우리의 사회학 전체가 그 증거이다....... 현대유럽의 쇠퇴하는 삶은 쇠퇴하는 본능들을 규범으로 하는 사회적 이상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 사회적 이상들은 늙고 병약한 종족들의 이상과 너무나 비슷하다. /#54. (소진의 생리학) 소진한 사람들의 판단이 가치의 세계에 어느 정도 침투했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최고의 가치들 전부가 소진한 자들의 판단에서 도출될 수 있다.
니체의 철학이 생生 철학이라고 불리는 이유? [아침놀]
니체는 철학을 ‘충동의 이성적 번역’이며, 근본적으로 철학은 '개인이 건강해지는 법에 대한 본능'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니체철학을 생의 철학, 삶의 철학으로 부르는 이유이며, 니체철학의 '신체성'을 특징짓고 있습니다.
"#553. 철학은 개인이 건강해지는 법에 대한 본능이다. ...... #539. 육체적으로 피로하면 사물들이 흐릿한 색깔로 보이고, 독감을 앓고 있으면 사물들이 괴물로 보인다"
*데카당스 : ‘힘에의 의지’의 퇴화현상 / 하강하는 삶의 징후 / 퇴화하는 이상, 퇴화하는 가치의 생리적 토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