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세미나자료 :: 기획세미나의 발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우선 텍스트를 원문에 가깝게 번역해주신 글뤼바인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발제하시면서 스스로 해석한 바를 말로 풀어주셔서 이해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니체와 니체 철학

 

 

흔히 ‘칸트를 전공했다’, ‘니체를 읽는다.’는 식으로 말하곤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칸트’나 ‘니체’는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칸트의 철학’이고 ‘니체의 텍스트’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전공의 대상인 ‘칸트’와 읽기의 대상인 ‘니체’는 ‘칸트의 철학’ 혹은 ‘니체의 텍스트’의 축약형이거나 비유적 표현일 따름입니다. 어떻게, 도대체, 왜 특정 타인을 전공합니까. 하지만 이런 언어 관행을 오해하면 정말로 니체 그 자체를 읽는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앞으로 언급될 ‘니체’는 니체의 ‘생각’이나 니체의 ‘철학’을 말하고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이해하고 싶은 것은 니체가 아니라 니체의 텍스트이며 구체적으로는 <권력의지>입니다. 니체가 아니라 니체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이해와 해석과 선택

 

 

텍스트는 우선, ①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②이해와 맞물려 자신의 관점을 담은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으며,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③그것을 취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미 니체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가진 채 의도(가령, 옹호하려는)를 섞어 텍스트를 대하면 이해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동양고전에도 이런 사례가 자주 있습니다.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遠之則怒

오직 여자와 소인만은 기르기가 어렵다. (여자와 소인은)가까이 두면 버릇없이 굴고 멀리하면 원망하기 때문이다.

 

 

<논어> 「양화」편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이 문장은 여성 비하가 포함된 것으로 읽힐 여지가 충분합니다. 현대 학자들을 민망하고 착찹하게 만드는 이 문장을 두고 많은 방어적 해석이 존재합니다. 저기에 적힌 ‘여자는 우리가 남녀(男女)를 말할 때의 여자가 아니다’부터 시작해서 ‘저 문장은 공자의 말씀일 리가 없다, 덧붙여진 것이다’ 등등 말이죠. 여러 학자들 중 유교철학자 신정근 교수는 딱 잘라 말합니다. “공자라고 해서 다 옳은 말만 한 것은 아니다.”

 

 

제가 반대한 것이 있다면 특정하게 ‘해석된 이해’ 대한 반대이지 니체 텍스트 자체에 대한 반대는 아닙니다. 해석이 이해를 앞서가면 견강부회가 될 따름입니다. 니체가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을 원했을까요. 니체가 남겨놓은 텍스트를 선입견 없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상대주의와 관점주의

 

 

상대주의를 태도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서로의 동등함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등하다는 것은 타인도 나와 같이 생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며 그의 의견도 사유의 결과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상대주의는 ‘네 생각도 옳고 내 생각도 옳다.’가 아니라 ‘네 생각과 내 생각은 동등한 존재성을 갖는다.’는 의미로써 상호인정과 상호존중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다음입니다. 상대주의적으로 각각의 존재성을 인정받은 두 개의 의견(해석, 주장, 해법 등)들은 경합하고 경쟁을 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쳐 더 설명력있고 더 상황에 부합하고 더 정합적인 것이 승리하게 됩니다. 다만 이 승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시 도전받을 수 있고 경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학문은 이러한 도전과 부정을 통해서 도약할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의 공부에도 날카로운 비판의 할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말한 (경합적)상대주의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입니다. 상대주의를 오해하면 극단적 상대주의가 됩니다. 극단적 상대주의는 기계적 중립을 불러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일반적인 평가에 대해 B라는 평가도 있으니 중립을 지키자, 따위의 기만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B는 아주 특수하고 근거도 불충분한 평가임에도 마치 1:1 함량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위안부 할머니는 피해자라는 의견이 있지만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의견도 있으니 중립으로 하자, 지구온난화가 거짓이라는 의견도 있으니 판단 유보하자, 이런 식으로 (논리와 근거경쟁을 통해 승리한)진실이 의도된 거짓과 나란히 서게 됩니다. 기계적 중립 현상이 나타나면 수정주의가 들어올 차례입니다.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 망가뜨리고 전체주의를 불러옵니다. 흔히들 절대주의가 전체주의와 가깝다고 여기지만 전체주의와 가까운 것은 이런 상대주의입니다.

 

 

관점주의는 이분법과 더 관계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모순 관계인 두 명제가 같은 평면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에 차이를 두는 것입니다. 모순 대신 차이를 말하는 것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차이란 ‘격차’, 즉 ‘위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높은 위계를 갖는 것은 보다 ‘객관성’을 획득한 것입니다(󰡔도덕의 계보󰡕 3논문 12절). 그렇다면 무엇을 더 위에 놓아야 하는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가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의 기준이 니체 철학의 공리가 될 것입니다. 니체의 텍스트는 한결같이 ‘생의 의지 → 자기 긍정을 통한 자기 극복 = 힘에의 의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분과학문으로 형성되어 있던 심리학․생리학이 근거가 됩니다. 생명은 자연적인 생의 의지를 갖고 있으며 인간도 생명인 이상 생의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도덕도 생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도덕에서 자연이 떨어져 나가면 거짓 도덕이 됩니다. 그렇게 발생한 거짓 도덕이 기독교 도덕이며 노예 도덕입니다. 주인 도덕은 생명력을 긍정하고 생명성에 유리한 것들을 미덕으로 삼는 반면 노예 도덕은 생의 의지를 쇠락시키고 자기 부정을 세뇌시킵니다. ‘생명성’이라는 기준(인간은 누구나 생명이기에 보편적 속성)을 통해 니체 철학은 객관성을 획득합니다. 만약 니체 철학에서 이 ‘생명성’이라는 것조차도 하나의 관점 정도로 치부한다면 철학적 가치를 잃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간 서구에서 억눌려있던 인간의 욕망이나 생명력을 해방시키고 기독교 도덕과 금욕을 무참히 박살내던 니체 철학은 이 지점에서 이미 충분히 획기적이고 훌륭합니다. 굳이 뭘 더 덧붙일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것을 어떻게 실천해나갈지가 더 긴급한 일일 것입니다.

 

 

사실과 해석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는 명제에서의 ‘사실’이 ①인식론적 사실인지 ②존재론적 사실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①은 우리가 각자 자신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대하기 때문에(인간이 가진 인식 한계) 온전한 모습의 사실을 인식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고, ②는 아예 그 사실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②가 맞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우선 니체의 명제는 거짓말쟁이의 역설에 빠지게 됩니다. 크레타 섬 사람 중 한 명이 “모든 크레타 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을 때처럼 이 명제가 사실이면 이 명제가 거짓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라는 명제 자체가 하나의 해석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저 명제는 순전히 임의적인 것으로 남게 됩니다. 또, 관점이라는 것은 목적어가 필요한데 그 목적어 자체가 없다는 것은 관점이라는 것 자체마저 부정하게 됩니다. 또, 사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관점이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완벽한 사실을 알 수 없다 하더라고 어떤 관점이 더 다양하게 보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①이 맞다면 이 명제는 니체의 독특함이 될 수 없습니다. 인식론적 한계와 상대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베이컨, 흄, 몽테스키외가 선취한 바 있고 칸트가 선배들의 의견을 취합하고 분석하여 니체보다 훨씬 세세하게 서술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인간의 이성을 신에게서 어렵게 떼어놓은 뒤 막판에 다시 신으로 줄행랑친 모습을 비판하긴 했지만 니체가 칸트의 이러한 아이디어까지 모두 거부했다고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독특함과 고유성

 

 

독특함(무리적 관점에서의 거리)은 힘에의 의지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독특하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이 힘에의 의지를 긍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독특함이 남들과의 ‘거리’와 비례하여 획득되는 덕목이라면 이것은 개인의 고유성을 오히려 훼손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고유성은 꼭 남들과 비교를 통해 인정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과 최대한 달라야한다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강박’이 자기 긍정을 방해하지 않을까요. 더구나 남들과 다름이 생의 의지를 고양하였음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독특하게 끓이겠다면서 초콜릿을 넣어 끊인 미역국이 생명을 긍정할 수 있을까요.

 

 

개별 사람 모두가 인간인 이상 비슷한 점도 수없이 많습니다. 인간에게는 일반성이라는 것도 존재합니다. 일반성은 반드시 인위적인 것도 아닙니다. 생물학적 특성(손가락 개수, 눈, 코, 입 등), 같은 언어 등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벽히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없듯 우리는 완벽히 주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적어도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그 언어의 틀에 상당부분 속박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객관성과 주관성은 정도의 차이가 됩니다.

 

 

그동안 수업시간 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곤 하면 그냥 발제문 프린트에 적어두곤 했는데 이번 시간에는 후기 덕분에 그것을 글로 옮길 수 있었네요. 아직도 자기 시간을 내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분들과 잠시동안이나마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즐겁기도 하고 또 위안을 얻습니다. 하루하루 생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모험같은 일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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