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양손에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들려 있었습니다.
<의미의 논리>는 '존재' 중심의 오래된 사유 이미지와 결별하고 '생성-사건' 중심의 새로운 사유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하는
들뢰즈의 장대한 철학 기획을 (<차이와 반복>과 더불어) 사실상 완성한 작품입니다.
<의미의 논리>는 '사건'을 이야기하고 '의미'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동시에 그 책 자체가 또 하나의 '사건'이자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사건'과 '의미'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이 책은 왜 우리에게 '사건'과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요?
박준영 선생님께서 강의 시간에 친절하게 설명해주시겠지만,
인터뷰 형식을 빌어 미리 몇 마디 들어봤습니다.
강사 소개 : 박준영
"수유너머 104 회원. 프로이트와 니체를 마구잡이로 읽으면서 10대중후반을 보낸 것 같다. ..."
(중간 생략, 자세한 내용은 여기http://www.nomadist.org/xe/lecture/2442761로 click!!)
벽에 붙어 있는 8장의 사진 중 맨 위쪽 가운데 있는
(니체 오른쪽에, 마르크스 위쪽에, 리쾨르 왼쪽에) 사진이 '들뢰즈'입니다.
Q1. 먼저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어떤 사람인지요? 사진을 보니까 그냥 외국인 아저씨 같으시던데요? ㅎㅎ'
Gille Deleuze
ㅎㅎ 예, 상당히 마음 좋아 보이지요? 실제로도 그런 편이라고 합니다.
들뢰즈가 직접 밝히기를 자신은 논쟁을 좋아하지 않고, 또 그걸 피하기도 했다는군요.
그래도 그가 말년에 남긴 인터뷰에서는 상당한 독설을 날리기도 했답니다. 특히 기자들을 ‘바보들’이라고 했더군요.
그런데 이런 건 대개 단편적이기 때문에 들뢰즈의 됨됨이에 대한 추측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들뢰즈 자신이 개인적인 기록들이 별로 남기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평전’이라고 할 만한 책도 나오지 않았지요.
중세나 근대초의 철학자들처럼 서신왕래를 활발히 한 것도 아니랍니다.
그냥 단편적인 일화 같은 것이 몇몇 남아 있는데, 그걸 말 그대로 신뢰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같이 ‘철학’만이 남아 있는 철학자도 드물다고들 합니다.
첫 시간에 제가 들뢰즈 연표를 나눠드릴 텐데,
거기 보시면 68혁명 때와 그 이후 사회 활동 정도가 좀 눈에 띄는 활동이고 그 외에는 모두 저작이나 강의 활동이란 걸 아실 겁니다.
그래도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들이 꽤 있을 테니 연구자들의 노고를 기다려 봐야겠지요?
Q2. <의미의 논리>는 철학사 안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존재론’이라는 것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데요,
딱 잘라 언제부터다 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철학의 의식적인 대상이 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로 문제가 된 것은 ‘존재 자체’지요. 여기서 존재 자체는 우리가 보통 '있다'라고 할 때, 그 ‘있음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삶과 세계의 대전제를 ‘존재’로 본 것이지요. 진정한 철학은 이것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이 ‘생성’이라는 것입니다.
생성은 존재와는 달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생성의 편에서 존재론을 전개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멀게는 헤라클레이토스부터 가까이는 니체와 베르그송에 이르지요.
들뢰즈는 이 중 후자, 즉 생성의 철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렇다고 들뢰즈가 ‘존재’를 탐구하지 않거나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큰 실수지요.
다만 들뢰즈는 생성의 철학자로서 생성을 존재와 대등하게 보거나, 때로는 오히려 생성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의미의 논리>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꾸준히 견지하고,
생성의 철학 편에서 스토아학파와 고대유물론자들 그리고 니체를 중심에 가져다 놓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조되는 개념이 바로 ‘사건’이지요.
20세기 들어 지금까지 이 철학적 존재론은 급진적인 정치정세(68혁명)와 더불어
그간의 주류 존재론에 균열을 일으키는 일군의 철학자들을 배출했습니다. 푸코와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존재 자체’의 특권에 반대하고, 생성으로 돌아가는 사유의 전환점에 위치한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성'과 '사건'의 작품 <의미의 논리>의 불어 원본, 국역본, 영역본, 일역본(시계 방향)입니다.
우측 하단에 있는 일역본은 아담한 사이즈이지만, 가격은 아담하지 않아요.
Q3. 저도 몇 년 전에 <의미의 논리>를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경험이 있습니다.
개념들도 낯설고 도무지 머리에 잘 안 들어오더군요.
들뢰즈를 처음 접하거나 저 같이 포기한 분들을 위해 들뢰즈를 읽는 쉽고,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날로 먹는 듯한... ^^)
ㅎㅎ 네, 사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떤 철학 텍스트도 이해하기에 쉬운 길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철학자의 텍스트이든지 그 텍스트가 요구하는 ‘사유의 근력’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근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해당 텍스트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읽고 또 읽고,
정리하고, 주석 달고, 종합하거나 나름대로 분석하는 ‘노동’이 필요합니다.
이러다 보니 철학에 대해 어떤 낭만적 선입견을 가진 채로 입문하면 쉽게 지치고 말지요.
즉각적인 감동과 충격은 예술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철학적 감동은 이 ‘노동’ 뒤에 아주아주 늦게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예술적 감동보다 오래오래 가지요. <의미의 논리>도 그럴 거라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강독강좌인 만큼 텍스트를 따라 산책하듯이 걷다보면 어느새 ‘개념의 성좌’가 우리 사유의 렌즈 안에 펼쳐질 것입니다.
<의미의 논리>를 보며 난로가 갖는 존재의 일의성에 대해 깊이 사색 중이신 준영샘
Q4.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을 쓰고 나서, 불과 1년 뒤에 이 책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이 두 책의 연관성이 있는지요?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 미리 살짝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강좌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하는 것인데요, 일단 개념적 연관성이 보입니다.
<차이와 반복>에서도 ‘사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요.
그런데 그때 ‘사건’은 ‘의미’와 더불어 간다기보다 잠재성과 현행화라는 개념과 함께 갑니다.
이 개념들도 우리가 책을 보면서 이야기해봐야 합니다만, 아무튼 개념적 위상을 달리해서 논의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상이 다르지만 ‘사건’은 반복되면서 변주되지요.
그리고 후기 철학에서도, 예컨대 <철학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저작에서도 ‘사건’은 다른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그것은 ‘의미’를 이미 <의미의 논리>에서 사건과 동급에 놓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궁금증만 더 유발한 것 같군요. ^^;;
‘살짝’ 말해 달라고 해서 일단 그렇게 합니다. ㅎ
Q5. <의미의 논리>의 내용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부탁드릴게요.
뒷 표지나 역자 해제에 나오는 설명만으로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첫 시간에 <의미의 논리>의 전체 틀거리를 짚고 나아가고자 합니다.
이 책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해가 더 힘들어 질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전 질문에서 잠깐 말한 것 같은데, 일단 이 책이 전제하고 있는 큰 틀은 ‘사건=의미’라는 구도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고, 쓰고, 소통하는 ‘언어’에 존재론적인 핵심이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정신분석과 구조주의, 현상학, 스토아철학, 그리고 플라톤주의의 전복으로 분기하다가,
마지막에는 시간론, 즉 영원회귀의 시간으로 수렴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철학사의 재구성이라고 할 만한 스케일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책은 철학적 개념들, 또는 이념들(Idea)이 등장하는 어떤 ‘무대’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이 무대에 어울리다 보면 아마도 들뢰즈의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Q6. 끝으로,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이 강좌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당연히, <의미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첫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그게 단 한번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겠지요? ^^
하지만 6번의 강좌를 하는 동안 우리 모두는 들뢰즈라고 하는 20세기 최고의 지성이 가진 사유 안에서
‘지적 즐거움’을 함께 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겁니다. 그 느낌이란 뭐랄까 ... ‘전율?’
그러고 보니 철학이란 ‘삶의 경이’라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나네요.
<의미의 논리>는 우리 자신의 사유 안에 잠자고 있던 어떤 ‘철학적 감각’을 일깨우는 책이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기대해 봅니다.
<의미의 논리>를 다 '이해'하면 나온다는 '전율'의 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