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워크숍, 10번째 세미나는 세미나를 시작하기도 전에 지친 모습이 많았다는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무더운 날씨 탓도 있고, 여러 가지 일로 에너지가 소진된 이유도 있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사전세미나가 막바지로 가면서 <비포와의 만남>을 위한 윤곽을 조금씩 그려나가고 있다고 보입니다.
남은 두 번의 사전세미나도 잘~~
먼저 이야기된 내용을 정리하면
1)우선, 비포가 가타리를 인용하면서 분열분석, 특이화과정을 미학적 차원과 연결지어 보는 관점은 중요한 맥락인데 발제에서는 안다루어졌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타당한 지적이며, <봉기>를 보면서 더 자세히 이야기되어야 할 부분으로 생각됩니다.
2)“경제적 불경기와 정신적 우울증이라는 사건들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하고, “분열분석적 방법은 정치적 치료법으로 응용”되어야 하며, “정치와 치료는 정차 올 날들에서는 동일한 활동”이 될 것이라고 할 때, (정치와 동일한 것으로서) 치료의 주체는 누구인가?
- 비포에게서 불분명한 점이라는 제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더 확인할 부분이라는 공유가 있었습니다.
3) <카오스>와 사회변화의 <속도>에 대한 연관성에 대해서도 <카오스>의 성격과 근거를 다시 점검해야 할 필요가 제기되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에게서 카오스와 무한속도는 사회(또는 자연)이 갖는 본질적 성격임에 반해, 비포는 <카오스>를 현대자본주의(비포의 표현으로는 기호자본주의)의 특성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도라는 것도 이것과 연관해서 정리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자본의 성장속도, 정보의 확산속도, 기호들을 정신이 포착하는 속도와 같은 것이 문제가 되고, 이 빠른 속도의 주기에서 빠져나오는 것(탈영토화)으로부터 해답을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포의 이 탈영토화는 속도를 늦추는 것, 또는 느림의 철학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비포에게서 세계는 이 카오스적 상황으로 인해 탈성장의 길로 자동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비포는 <속도에서 기인한 카오스>에서 <방황(공황,불경기)으로 빠져듦으로써 일어나는 카오스>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노년의 사고를 위한 순간이 도래했다” 라거나 “노년은 필연적인 느림으로써 흐름들의 무한속도를 정교화 할 수 있는 카오스모제적인 지혜에 이르는 문들을 열어놓는다”고 하면서 비포 자신은 이런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년의 특성은 ‘노쇠’와 연관이 있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세계는 고령이 보여주는 특징, 미래에 내기를 걸 용기를 가질 수 없는 노쇠를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내 생각에는 비포가 속도를 늦추는 것과 속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한다고 보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자본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에 등한시(?)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묻어버릴 것에 대해 구구절절 파고드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하는....)
4) 정치, 예술, 과학에 대한 이야기에서 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빠졌다는 점도 음미해 볼 대목이 있어보입니다. 어쩌다보니 빠진 것은 아닐 것이고 비포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으로 봅니다. 불확실성, 카오스, 분자적... 과 같은 것은 분명 현대 물리학의 발견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현대물리학의 문제들을 끌고 들어오는 것은 철학적으로 많은 난제들을 가져올 것으로 보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5) 이 외에 <보드리야르와 푸코의 논쟁>부분이 언급되면서 ‘푸코는 욕망에 대해 부정적 견해가 강했고, 그래서 보드리야르가 푸코를 상대로 욕망이론을 비판한 것은 초점이 안맞는 것’이라는 지적과 <앙띠오이디푸스>이후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에 대한 입장변화가 있었던 점이 이야기 되었으며, 자살에 관련한 비포의 입장과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한 내파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또,... 미처 메모를 못해서 잘 생각이 나질 않네요. ‘보들레르’도 까메오출연을 했고...
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비포는 경제 결정론적, 환원주의적 입장을 문제로 삼고 있는데 ...
비포 역시 <정신노동>,<비물질노동>이 지배적인 형태가 되면서 자본주의의 국면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하는 점에서,
그리고 이로부터 많은 것을 설명할려고 하는 것은
비포의 표현을 빌어서 이야기하면 환원주의적 방법론이 아닌가?
<정신노동><비물질노동>이 지배적인 형태가 되었다고 하는데 ...
노동은 본질적으로도 <하이브리드적>인 것이 아닌가?
곧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은 결합되어 있는 것이고(그렇지 않다면 근대적인 의미에서 교육과정과 제도는 불필요한 것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개별 노동의 성격이나 양상에 따라 <하이브리드적>인 양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비물질노동>이라는 표현에서 <비물질>이란 것은 무엇일까?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이라는 의미일까?
본래 물질이란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란 의미는 아닌 듯하고.....
노동시간과 가치사이의 관계는 설정할 수 없다... 생산물이 비물질적이고, 노동시간이 정해지지 않기 때문에....
생산물이 비물질적이라고 하는 것... 비물질적??? 하이브리드적.....
노동시간이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방식과 같은 것에 따라 더 분석해보아야 할 것......
...뭐 이런 것들이 머리속에서 계속 돌아다니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