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한 내용들은 사피엔스님이 깔끔하게 요약, 정리해주신 관계로, 저는 그냥 책을 읽으면서, 또 세미나 시간에 가졌던 주변적 생각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하여
진은영 씨는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다 고통이다'라는 뜻의 일체개고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지 말 걸 그랬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면 니체 표현대로 수동적 니힐리즘에 불과할 것이지만, 기실 "불교의 진리는 니체가 능동적 니힐리즘이라는 용어를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것을 니체의 철학 이상으로 정치하고 풍부한 형태로 보여준다"고 쓰고 있습니다. 즉 일체개고는 그런 허무주의적, 퇴행적 의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피노자주의자라면 "기쁨의 감수성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충고할 것이다"라고도 했습니다.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다 고통이든, 다 즐거움이든, 고통과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것, 어쩌면 그것은 모든 것을 다 고통으로 느끼면 고통이요, 즐거움으로 느끼면 즐거움일 수 있다는 것 말이죠. 이는 불교에서 무아나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구요. 물론 불교가 즐거움을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요. 더욱이 생성과 소멸을 끝없이 반복하는, 거대한 총체적 세계 앞에 서면, 고통이냐 즐거움이냐는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을 것 같군요. 물론 이는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때만이 가능하겠지만.
■ '새로운 습관'에 대하여
2부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던 구절은 이 부분입니다. 『중독된 사람은 새로운 습관을 붙이는 데 무능력하다. 따라서 자유와 해방의 능력은 베르그송이 소박하게 말했듯이 "무한히 옛 습관을 새로운 습관으로 대체시키는 힘"이다. 이것은 옛 습관을 끊임없이 무화시키는 능력 이외에 다름 아니다.』
가슴에 와닿은 이유는 이 부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의 시작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 안에 낡은 것을 찾아내면서 새로운 사유가 시작되고,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려고 시도하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니까요. 니체를 읽으며 내 안의 낡은 것을 찾으려는 우리들은 일단 새로운 사유나 삶을 적어도 시작은 한 셈입니다. 이 구절이 더욱 의미있는 건 처음 뿐이 아니라 언제든 끊임없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 로버트 G. 모리슨의 견해
97쪽 각주에는 니체와 불교의 유사성에 대한 로버트 모리슨의 견해가 나와있는데, 잘 보면 흥미롭습니다. '아이러니한 유사성'도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모리슨의 주장에 따르면 니체가 수동적 니힐리즘의 대안으로 제시한 힘에의 의지는 붓다가 말한 갈애(渴愛)와, 그리고 힘에의 의지의 개체화를 의미하는 '자기극복'은 불교의 마음수련과 유사성을 갖는다"는 말은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말이지만, 눈에 확 띄더군요. 붓다가 말했다는 '갈애'를 불교 사전에서 찾아보면 "목이 말라 물을 찾듯이 범부가 몹시 삼독(三毒) 오욕(五慾)에 집착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힘에의 의지를 불교의 갈애에 비유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지 궁금해집니다. 또 '자기극복'을 '힘에의 의지의 개체화'라는 한 표현은 자기극복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만, 이 역시 니체의 정확한 의도와 일치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인식과 생성의 배타성'에 대하여
세미나 시간에 제가 했던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를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123쪽에는 '인식'이란 말과 '인식론'이란 말이 모두 등장합니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인식은 '아는 행위'이고, 인식론은 인식의 기원, 구조, 범위, 방법 등을 탐구하는 학문을 말합니다. 제가 든 의문은 매우 간단합니다. 인식과 생성이 배타적이라면(여기서 배타적이란 말의 의미는 서로 공존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생성은 어떻게 인식하느냐(알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니체를 읽고 생성의 철학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모두 인식의 일종입니다. 그렇다면 '인식과 생성은 배타적'이라고 할 때의 인식은 알게 된다는 광의의 인식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은영 씨가 '공동작인'을 설명하면서 얘기한 '선형적 인과론에 입각해 세계를 파악하려는 인식론'에서의 인식론(또는 인식)의 의미로 좁히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오라클님께서 말씀하신 '영원성을 부인하는 영원성'이나 '인과론을 부정하는 상호인과성'처럼 패러독스적 의미로 쓰인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저는 인식이라는 말 앞에 '선형적 인과론에 입각한 인식'이라는 전제가 생략된 것으로 보는 것, 즉 협의의 인식으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건 인식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식론으로 말한다면 선형적 인과론에 입각해 세계를 파악하는 인식론이 아니라 공동작인처럼 선형적 인과론의 원인 개념 없이 변화와 생성을 사유하는 것도 또다른 종류의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니체가 '인식'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를 공부하면 좀더 명확해지겠지만, 니체의 용법을 떠나 '인식'이나 '인식론'을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게 제게 떠오른 의문입니다.
■ 시간의 가역성에 대하여
사실, 2부를 읽으면서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시간의 가역성'입니다. 다음 시간에 하게 될 이시적 상호인과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원인과 결과의 상호의존성과도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원인.결과의 상호의존성과 이시적 상호인과, 또는 용수의 공(空) 사상에 따라 선형적 인과론을 거부할 경우 우리는 '과거는 고정 불변이 아니며 현재와 미래에 의해 변화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125쪽 각주 밑부분에 나온 화엄 철학의 연기관에도 "시간의 가역성, 즉 현재 순간에 미래와 과거가 내재해 있다는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이런 시간의 가역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현재가 과거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림으로써 과거의 일을 질적으로 다르게 변화시키는 '일종의 과거 재해석'을 시간의 가역성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과거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해석을 변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가 과거(A)에 영향을 줌으로써 기존 과거가 아닌 과거의 새로운 모습(A')이 나타났다면 A'는 과거인가요 미래인가요. 벤야민의 역사철학에서도 이 문제로 엄청 머리가 아팠는데, 제가 내린 결론은 이건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상식적으로,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근대적, 직선적 시간관으로는 현재.미래가 과거에 영향을 주고 과거를 바꾼다는 명제는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일입니다. 과거사가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고 해도 직선적 시간관에서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미래에 다른 모습을 하고 반복적으로 도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직선적 시간관이 아니라 순환적 시간관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순환적 세계관이라는게 말이 쉽지 받아들이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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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각주의 내용까지 섬세하게 읽어내는 아포리아님의 성실하고 꼼꼼한 책 읽기 능력이 부럽습니다. 또 본인의 문제 의식에 기반하여 작성된 후기를 읽는 것은 저에게도 즐거우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아포리아님의 후기를 읽고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나눠보려고 합니다.먼저, 인식과 생성의 배타성에 관한 것입니다.
저도 아포리아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식'이라는 개념을 그 개념이 사용되는 혹은 정의되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부정확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니체가 어떤 맥락에서 인식을 논하고, 그에 기반해서 생성과 인식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는지는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탐색해볼 문제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우선 지금 상황에서 제가 생각해본 수준에서, 부족하지만 의견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생성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식의 순간에도 생성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성의 인식은 인식의 그 순간 생성의 흐름에 의해 곧바로 부정된다." 정돈된 형태는 아니지만, 이런 생각을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래서 인식과 생성은 배타적이라고 표현한 게 아닐까요? 이 문장을 쓰면서도, 제가 '인식'과 '생성'에 대한 특정한 인식, 선입견 혹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구나. 라는 생각도 동시에 합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생각을 꺼내놓고 점검해야 다른 방식의 사유로 나아갈 수 있을 거 같아서 꺼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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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시간의 가역성에 관한 것입니다.
저도 아포리아님처럼 시간의 가역성에 대해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고, 머리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삶으로,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건 더더 어렵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제가 지금 이 순간 이해하고 떠올린 생각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과거에 대한 재해석은 시간의 가역성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현재적 관점의 미화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실체론적 시간관에 입각한 해석일 수도 있다.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은 실체로서 그대로 존재하는데 현재의 관점에서 그 과거 사건을 단순히 '재해석'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가? 이런 의문 자체가 이미 실체로서 존재하는 과거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 어떠한 시간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선택, 해석에 따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사실, 무언가 달라진다는 표현 자체가 이미 어떤 실체를 전제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 순간의 생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서로의 글과 말이 새로운 사유를 촉발하고 생성하도록 자극하고 이끌어줄 수 있다는 점이 기쁘고 즐겁네요!
여러모로 생각을 자극하는 멋진 후기를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포리아가 언급한 것들이 모두 흥미로운 주제들이라, 모든 주제를 언급하고 싶은 정도입니다. ㅎㅎ 그리고 아포리아의 문제설정(긍정적이거나 부정정인 어떤 지점)이 일관되어 있어, 생각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습니다. 다른 누구도 나를 극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 밖에는!" 아포리아의 문제설정이 새로운 지점으로 도약하는데 도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몇가지를 말해볼께요^^ "
1. 일체개고 :: 문제는 '변화(생성)'가 아니라 변화를 부정하는 '태도(니힐리즘)'
아포리아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면서, 진은영이 말하려고 하는 일체개고의 포인트에 대해 추가합니다. '모든 것이 다 고통이다'는 의미의 일체개고가 수동적 니힐리즘이 아니라, 능동적 니힐리즘일 수 있는 이유는 '고통에 대한 관점의 이동'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상적으로 고통은 '변화'(즐거움 조차 사라지기에 고통)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고통은 '변화를 부정하는 태도'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생성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의 모든 삶은 고통일 것입니다!!! '니힐리즘이 생성을 부정하는 태도'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즉, 모든 것이 다 변화(생성)입니다. 따라서 변화(생성)을 부정하는한, '모든 것이 다 고통일 수밖에 없지요!!
"일체개고는 '모든 것이 고통이며 즐거움도 사라지기에 고통이므로 헛되어 즐거움과 명랑성을 추구하지 말자'거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지 말 걸 그랬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든 조건들이 변화하며 그에 따르는 만남들과 만남의 좋고 슬픈 느낌들도 변화한다. 이런 변화의 문제를 고통이라고 표현한 것은, 변화를 부정하는 태도가 고통을 만든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일체개고는 변화하는 생이 허무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수동적 니힐리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고통은 변화 때문이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고 회피하려는 태도 때문에 생긴다." (p84)
2. 로버트 G.모리슨의 견해 :: 힘에의 의지=갈애? / '자기극복'은 '힘에의 의지의 개체화'
[붓다가 말했다는 '갈애'를 불교사전에서 찾아보면 "목이 말라 물을 찾듯이 범부가 몹시 삼독(三毒) 오욕(五慾)에 집착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힘에의 의지를 불교의 갈애에 비유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지 궁금해집니다. 또 '자기극복'을 '힘에의 의지의 개체화'라는 한 표현은 자기극복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만, 이 역시 니체의 정확한 의도와 일치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아포리아 후기
힘에의 의지(니체)와 갈애(불교)의 유사성에 대하여 :: 저도 불교의 '갈애'를 공부한 적이 없지만, 아포리아가 찾은 의미를 전제로 '갈애와 힘에의 의지'와의 유사성을 생각하면-.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한다. (차라투스트라 '자기극복)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생명 자체는 힘에의 의지다.(선악의 저편 13절)" 이때의 힘에의 의지는 생명 혹은 생명력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갈애를 "목이 말라 물을 찾듯이 범부가 몹시 삼독(三毒) 오욕(五慾)에 집착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리고 여기에서 부정적 뉘앙스를 제거한다면 그것은 힘에의 의지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힘에의 의지가 뜻하는 '힘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생명의 의지'는 갈애의 '목이 말라 물을 찾는 생명의 욕망'과 같을 것입니다. 생명의 '실존욕망'은 곧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려는 욕망 자체가 바로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자기극복'이 '힘에의 의지'의 개체화라는 말에 대하여 / 개체화=자기극복 :: 힘에의 의지를 힘들의 복합체로서 하나의 '잠재성'으로 보았을 때, 자기극복은 잠재성이 '개체화(현행화)'되는 과정이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영원한 자기창조와 영원한 자기파괴라고 하는 이러한 나의 디오니소스적인 세계 ...... 이러한 세계가 힘에의 의지다. ...... 힘에의 의지는 힘들의 장 전체에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p122)" 힘에의 의지가 '변화.생성을 만들어내는 힘들의 장'이라면, 자기극복이란 '변화되고 생성되는 것(개체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화.생성되는 것(개체화)은 이전과 다른 것이 개체화되는 것이므로 자기극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과 같은 것은 이전의 개체 속에 묻혀있을 뿐, 새롭게 개체화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개체화의 과정은 자기극복의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도라 던컨이 모던발레를 만들었던 과정을 떠올려보면. 당시 발레의 세계를 하나의 힘에의 의지(변화.생성을 만들어내는 힘들의 장)로 파악한다면, 거기에는 지배적인 고전발레와 이것과 다른 스타일들이 뒤섞여있을 것입니다. 고전발레가 여전히 지배적 지위를 가지고 있겠지만 새로운 춤을 창안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러한 힘들의 장 속에서 이사도라 던컨은 기존의 고전발레와 다른 새로운 스타일로서 모던발레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힘에의 의지(변화.생성을 만들어내는 힘들의 장)가 개체화(변화.생성)된 것이며, 기존의 스타일에 대한 자기극복의 과정입니다.
3. 인식과 생성의 배타성 :: :: 존재의 목적에 봉사하는 인식, 생성의 긍정에 봉사하는 인식!
[니체의 용법을 떠나 '인식'이나 '인식론'을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게 제게 떠오른 의문입니다.] 아포리아 후기
니체 역시 인식을 부정적으로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우리의 지식(인식)이 존재의 목적에서 자유로와 질 때, 즐거움을 획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즐거운 학문. 1부 1. 존재의 목적을 가르치는 교사] 그래서 '존재의 목적을 넘어, 어떻게 즐거운 학문을 할 것인가' 이것이 [즐거운 학문]의 문제설정입니다. 학문 자체가 지식이며 인식입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예술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무기로 학문과 과학의 실증주의를 사용합니다. 그러다 [즐거운 학문]에서는 다시 학문.지식이 갖는 형이상학적 측면을 비판하면서, 학문.지식에 대한 관점의 이동을 보여줍니다!!
니체에게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이유를 가지며 긍정됩니다. 니체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기 위해 제안하고 있는 방식이 바로 '자기극복'입니다. 니체는 인식이나 인식론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어떤 인식인가' 일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에 봉사하는 인식인가, 생성의 긍정에 봉사하는 인식인가? 혹은 진리의지에 봉사하는 인식인가, 건강한 삶에 봉사하는 인식인가? 후자에 의한 전자의 극복, 이것이 인식의 자기극복일 것입니다. 존재의 인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생성의 인식은 '인식을 부정하는 인식'이 될 것입니다.
인식과 생성의 배타성에 대하여 :: 인식은 생성이라는 흐름 가운데, 하나의 단면(존재)을 고정하여 포착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식은 '존재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생성은 흐름 자체인데, 인식은 그것을 고정시킨다는 점에서 생성과 인식은 서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존재의 인식'을 넘어 어떻게 '생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는 생성의 흐름 자체이므로, 우리가 인식하는 것을 고정적이거나 절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식(존재의 인식)을 관점적으로 긍정하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인식(존재의 인식)을 절대화하지 않고, 관점적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중독된 사람은 새로운 습관을 붙이는 데 무능력하다. 따라서 자유와 해방의 능력은 베르그송이 소박하게 말했듯이 "무한히 옛 습관을 새로운 습관으로 대체시키는 힘"이다. 이것은 옛 습관을 끊임없이 무화시키는 능력 이외에 다름 아니다.』 새로운 인식으로 하여금 낡은 인식을 대체시키는 능력, 이것이 인식의 자기극복이며 생성하는 인식의 힘일 것입니다!
4. 시간의 가역성은.... 에너지가 딸려서 못쓰겠어요 ㅎㅎ 다음 시간에 토론주제로 돌려도 좋겠어요 ^0^
"직선적 시간관으로는 현재.미래가 과거에 영향을 주고 과거를 바꾼다는 명제는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일이다. ...... 현재가 과거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림으로써 과거의 일을 질적으로 다르게 변화시키는 '일종의 과거 재해석'을 시간의 가역성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과거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해석을 변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맞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미화이거나, 정신승리와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가 과거(A)에 영향을 줌으로써 기존 과거가 아닌 과거의 새로운 모습(A')이 나타났다면 A'는 과거인가요 미래인가요." _아포리아
"시간을 의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니체는 시간조차 의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구제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과거를 구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과거에 매여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시간의 가역성이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성질'이며, 이에 기반한 반실체론적 시간관이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반실체론적 시간관에 따르면, 시간을 재구성하고 재배치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SF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관점의 이동을 통해 가능한 일입니다.
[ 실체론적 시간관 ] 시간의 비가역성에 기반한 관점 = 직선적 시간관(선형적 시간관)
"시간은 거꾸로 흐를 수 없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ㅡ> 과거를 고정불변의 시간으로 보는 것은, 시간에 대한 실체론적 관점이다!!
(실체 : 어떤 고정불변하는 본질 / 실체론적 사유 : '사물에는 고정불변하는 본질(실체)이 있다'고 보는 관점)
[ 반실체론적 시간관 ] 시간의 가역성에 기반한 관점
"시간은 거꾸로 흐를 수 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있다"
"현재와 미래가 과거에 영향을 주고 과거를 바꾼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시간이 존재하겠는가?" (p115)
'과거는 고정불변이 아니며 현재와 미래에 의해 변화가 가능하다'
"시간의 가역성, 즉 현재 순간에 미래와 과거가 내재해 있다." (P125. 주)
"과거는 실체화된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단 한번의 생성으로 새롭게 뒤바뀌는 시간이다." (p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