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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_발제]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2부 1~2

우림 2020.01.16 20:08 조회 수 : 84

2부 용수의 공과 니체의 영원회귀 - 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

 

불교와 니힐리즘

 

괴로운 경험은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고, 즐거운 경험은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상함의 괴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삶과 우리 자신의 조건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 마음을 딴 데로 돌리게 만드는 소동을 (오락, 교제, 전투 등) 만든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고통이라는 일체개고 (죽음 앞의 노년, 숱한 실패, 전쟁이나 질병 등 부정적 체험 등) 는 행운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달콤한 환상을 넘어서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음미해보아야 할 명제이다.

 

불교, 무자성의 철학

 

불교의 역사는 인간 사유에 깊게 뿌리 내린 실체론을 제거하고 끝없이 변화하는 삶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논쟁과 수행의 역사이다.

즐거운 경험은 무자성, 비실체성을 지닌다. 맛있는 음식이나 옷도 허기나 추위라는 조건과 만날 때만 즐거움의 원인이 되며, 필요 이상으로 주어질 경우 오히려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즉, 즐거움의 원인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모든 것은 특정한 만남의 결과이다. 눈과 외투가 만날 때, 고독한 마음과 누군가의 말 건넴이 만날 때 / 햇빛과 코트가 만날 때, 숱한 말들에 지쳤을 때는 누군가의 다정한 말 한마디도 짜증난다.

모든 조건들이 변화하며, 그에 따르는 만남들과, 그 만남의 좋고 슬픈 느낌들도 모두 변화한다. 우리는 왜 이런 변화의 문제를 고통이라고 표현할까? 변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 때문이다. 즉 고통은 변화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화를 거부하고 회피하려는 태도로 인해 발생한다.

중독된 사람은 새로운 습관을 붙이는데 무능력하다. 자유와 해방의 능력은 무한히 옛 습관을 새로운 습관으로 대체시키는 힘이다. 해탈도 탐욕, 증오, 어리석음이라는 3가지 중독에서 벗어나 변화의 진리를 가장 극한의 수준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앎이 아니라 감응이다. 이 때문에 모든 지혜로운 자들은 비유로서 말한다. 개념보다 비유가 감응을 촉발시키는 힘이 크기 때문이다.

 

아비달마 불교도, 또는 인도의 책벌레들

 

연기법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날 때에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거짓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질 때 저것이 사라진다. 연기법은 그 진리를 듣는 순간 그들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화할 만큼 놀라운 감응의 생산 능력을 지닌 이론이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 는 하나의 극단과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또 하나의 극단.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붓다의 이 가르침은 어느 것에도 고정불변하는 실체성이 없으며, 단지 만남의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이 생성, 소멸을 거듭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집착을 제거한다.

 

용수, 반시대적 사상가

 

모든 존재들이 공하다. 우리의 자아를 비롯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단지 변화하는 물질적, 정신적, 심리적 요소들의 복합체이다.

연기법을 공하다고 주장하는 용수는 요소, 연기, 업, 열반의 자성을 부정하며 공사상을 통해 불교에서 실체론적인 사유를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니체가 말했던 반시대적 사상가에 가장 부합할 만하다.

 

1. 니체와 불교의 만남.

 

불교는 죄에 대한 싸움을 말하지 않고 고통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 선악의 저편에 있다.

불교는 복수 감정과 혐오 감정과 원한 감정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불교를 쉽게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나 지쳐버린 문명 위한 종교로 본다면 수동적 니힐리즘으로 보는 것이다.

용수의 중론은 동일성과 실체론에 대항하여 생성과 차이를 긍정한다.

인과론 비판은 근대적 의미의 니힐리즘을 비판하는 것이고, 영원회귀의 사유에 도달하기 위한 핵심적 작업이다.

 

2. 근대적 니힐리즘의 실체론 비판

1) 정교화된 실체론 비판의 필요성

훌륭한 적이 훌륭한 무기를 만든다.

 

용수는 불교의 연기 개념에 세련되고 치밀한 형태로 침투한 실체론적 사유를 물리치기 위해 보다 정교한 비판을 수행해야 했다. 훌륭한 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훌륭한 무기로 벼려낼 수 있었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생성철학의 중요 개념을 직관적으로 포착해냈기 때문에 시적인 모호성을 띤 채로 등장했다.

왜 생성 철학은 철저한 반실체론적 입장을 견지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실체론이 필연적으로 우리를 니힐리즘에 빠뜨림으로써 생성의 세계와 그 세계 안에 놓인 우리의 삶을 부정하고 증오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즉 삶과 생성에 대한 증오가 실체라는 허구를 산출한다. 따라서 생성을 긍정하려는 사유자는 반드시 실체론과 대결해야한다.

실체론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비판은 신 개념에 대한 비판이다. 생성과 변화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불변하는 신을 허구적으로 조작해낸다.

 

신은 정말 죽었는가?

 

근대적 니힐리즘 : 무신론자는 신이 살았건 죽었건 상관없이 자신들의 진리와 가치를 추구한다. 종교적 실체론을 부정하고 과학적 세계관을 수용하며 신 대신 새로운 초월의 진리가 등장한다. 과학적 자연법칙, 진보의 교설 등. 이것은 니힐리즘을 정교화하는 시도이다. 더 이상 종교적 신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과학과 진보라는 근대의 지배적 형식을 통해서 니힐리즘을 표현한다.

니체는 근대 과학의 근간이 되는 선형적 인과성을 낡은 신학적 개념의 변종이며 실체론이라고 본다. 선형적 인과성 비판이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라는 두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용수의 공 사상은 니체의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개념과 반실체론의 모호한 관계를 명료하게 해명해준다.

 

2) 용수의 정교화된 반실체론 : 인과연기론 비판

연기법은 공하다.

 

상주론 :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자아를 상정함으로써 생성과 변화 자체를 허구로 간주하는 실체론.

단멸론 : 모든 것은 생성, 소멸하는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으므로 허무하다는 염세적 견해.

붓다는 연기법으로 실체론적 사유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고통을 제거하고 생을 긍정하는 새로운 길인 중도를 모색한다.

모든 사물은 실체성을 띤 것이 아니라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이때 요소들의 인과적 결합을 연기라고 한다.

생성과 소멸을 긍정하기 위해서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적 발생이 아닌, 원인과 결과 사이의 상호의존적 발생으로 규정해야 한다. 용수는 상호의존성을 공이라고 부른다.

연기의 공성을 비유적으로 설명해보면, 아담이 풋사과를 먹고 배탈이 났을 때 :

풋사과가 덜 익어 배탈이 났다. : 덜익은 풋사과와 배탈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사건이고,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다.

풋사과가 아담의 허약한 장과 ‘만날’ 때만 풋사과는 배탈의 원인이 된다. : 원인과 결과를 서로 분리해서 사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물은 다른 사물에 의존해서 생성된다. 원인도 결과에 의존해 생성된다. 이처럼 상호인과성은 인과성의 부정을 의미한다.

상호의존적 발생은 생성이 일방향의 연쇄적인 인과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들의 상호의존 속에서 형성됨을 의미한다.

상호의존적 발생의 두가지 중요한 의미 :

1. 상호의존적 발생의 관점에 따르면 사물은 자성을 가지지 않으므로 개별자들의 생멸에 근거한 생성, 변화하는 세계가 허무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별자들의 생멸은 단지 우리가 자성이라는 허구적 논리에 현혹되었을 때만 발생한다. 우리가 독립적 실체성을 지닌 개별자라는 허구적 관점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니힐리즘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2. 풋사과, 아담 등의 개별 사물들이 있고 그것들이 사후적으로 만남으로써 사건을 구성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존재하는 것은 사건이며, 사건 속에 우리는, 개념의 논리로서, 개별 사물을 구성하는 것이다. 언어와 개념의 논리를 절대화하지 않는다.

 

과거, 현재, 미래는 공하다.

 

용수는 과거가 현재를, 현재가 미래를 낳는다는 인과적 시간관을 비판한다.

시간의 인과를 사물의 인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방식, 즉 ‘시간은 사물을 원인으로 하여 생기는 것’ 으로 보는 입장은 설일체유부의 시간관, 삼세실유설이라고 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찰나가 각각 실체성을 지니고 존재한다는 시간존재론이다.

한 찰나가 원인으로서 바로 이웃한 다음 찰나를 발생시킨다는 인과관계에 기반한 시간관을 용수가 거부한 이유는 업의 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업은 과거 행위의 결과로서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는 인과적 결정론이다.

 

3) 니체의 반실체론적 사유의 재구성

선형적 인과성에 대한 거부

 

용수의 공 사상에 나타난 논점들을 통해 니체의 반실체론적 사유를 정교화해보자.

1. 실체론의 철저한 제거를 위해 제 1원인과 함께 인과성 자체가 거부되어야 한다. 제1원인이든 과학적 인과성이든 원인-결과를 상정하려는 인과본능은 단지 익숙하지 않은 것 앞에서의 공포에 지나지 않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니힐리즘의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 파악한다. 신의 죽음 이후에 등장한 과학의 실체론이야말로 (진정한 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2. 인과성 비판의 효과적인 전략은 원인과 결과의 상호의존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연속이 아니라 서로 상대 속으로 맞물림. 즉 이어지는 개별적 계기들이 원인과 효과로서 서로를 규정함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건의 복합체’ 이며 원인과 결과, 주체와 객체, 행위자와 행위 등의 실재성은 논리학의 환상에 불과하다.

3. 사물, 원자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과율도 불필요하다. 변화와 생성을 사유하는 철학을 위해선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발견이 요구된다.

4. 변화와 생성의 사유는 인과의 상호의존성 논리에 입각해 구성되어야 한다. 용수는 연기법을 거부하고 상호적 발생이라는 연기의 공성을 포착함으로써 생성을 긍정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도 상호의존성을 표현하기 위한 개념이다.

 

힘에의 의지 개념과 상호의존성의 사유

 

힘은 언제나 다른 힘들 간의 상호의존적 작용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힘의 성질은 힘의 장 전체 속에서 작용하는 다른 모든 힘들의 양들 간의 상호적 종합을 통해 형성된다. 5N의 힘이 3N의 힘으로 변화할 때 이는 역학장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힘들의 어떤 종합상태에서 다른 종합상태로의 이행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모든 힘들이 그 대로 보존된 상태에서 하나의 힘만이 변화할 수는 없다. 특정 힘의 감소나 증대는 언제나 모든 힘들 전체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특정 힘의 감소나 증대는 언제나 모든 힘들 전체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힘과 힘 사이에는 우리가 원자들이나 혹은 사물들 사이에 있다고 가정하는 빈 틈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사물들 각각을 독립적 존재로 상정하듯 아무런 영향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각각의 힘들을 상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힘의 장 전체의 변화와 이행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지라고 부른다. 의지는 ‘힘에의 의지’를 의미하며 이때 의지되는 것은 새로운 힘들의 상태이다. 힘에의 의지는 힘들의 장 전체를 바꾸는 것이므로, 그 장 안에서 하나의 힘을 개별적으로 실체화하여 원인으로 삼는 경우에는 포착되지 않는다. 힘에의 의지는 힘들의 장 전체에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을 만들어내는 무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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