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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 일본어판 역자후기]

 

정치와 정치철학은 데모스와 더불어 있다

 

마츠바 쇼이치(松葉祥一)

김상운 옮김

 

 

본서의 테마는 ‘정치철학은 가능한가’라는 물음과, 그 전제가 되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랑시에르는 원래 책의 뒷표지에서 본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1

 

정치철학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철학의 어떤 장르도 영역도 아니다. 그것은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마주침의 이름이며, 이 마주침에서 정치의 역설, 즉 정치에는 고유한 기반이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정치가 시작되는 것은 사회의 당사자들의 지배관계가, 또한 몫의 배분의 자연적 질서가, 정원 외의 당사자 즉 민중(데모스)의 출현에 의해 중단될 때이다 ― 이것에 의해 셀 수 없는 것의 모임(민중)이,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된다. 정치의 비정치적 조건인 평등이 효력을 지니는 것은, 오로지 이 계쟁을 초래하는 당사자(민중)의 작용에 의해서이다. ― 그것에 의해 정치공동체가 계쟁의 공동체로서 제도화된다. 이 최초의 계산착오 때문에, 합의를 만들어내는 토의와도, 절대적인 잘못과도 다른, 불화의 논리가 제도화되는 것이다.

‘정치철학’은 플라톤에 의한 외양의 기피와 더불어, 민주제 특유의 계산착오와 계쟁의 기피와 더불어, ‘진리에 기반한’ 정치의 청구와 더불어 시작된다. 본서에서는 이 진리의 제도 또는 거꾸로 정치적 실천에서의 이런 변화의 결과가 물어지게 된다.

이로부터 오늘날, 마침내 정치의 ‘종언’과 정치의 ‘회귀’가 동일한 것과 마찬가지로, 합의의 목가와 인도주의의 멜로드라마가 서로를 보완하고 있음을 분석하기 위한 몇 가지 지표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즉, 랑시에르는 본서에서, 우선 민주제(데모크라시)와 더불어 정치가 성립했음을 논증한다. 민중은 공동체의 몫(재산이나 직업)을 갖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제의 이름으로 지배권까지도 요구하게 된다. 그것에 의해 민주제가 평등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며, 지금까지 안정된 지배제도에 균열이 들어선다. 랑시에르는 이런 계쟁이야말로 정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랑시에르는 지금까지 철학은 이런 의미에서의 정치를 잘못 파악해 왔음을 문제 삼는다. 가령 플라톤은 민주제에 대해 이념이 지배하는 공화제를 대립시켰다. 랑시에르는 이와 같은 입장을 원리(아르케)에 기초를 둔 정치학이라는 의미에서 아르케-정치라고 부른다. 또한 민중을 권력투쟁의 당사자로 비켜 놓거나(아리스토텔레스), 인간-시민으로 비켜 놓거나(홉스) 하는 정치철학을 부차적·평행적 정치학이라는 의미에서 파라-정치라고 부른다. 나아가 맑스처럼 민중이 초래하는 불화를 절대적인 것으로 하는 정치철학을 메타-정치라고 부른다. 그리고 랑시에르는 이런 정치철학이, 모두 앞에서처럼 의미를 잘못 파악했음을 밝힌 뒤, 새로운 정치철학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우선 본서의 서문부터 3장까지(원저에는 장 번호가 붙어 있지 않다)에 근거하여 랑시에르가 정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살펴보자. 이어서 주로 4장에 근거하여 그가 말하는 정치의 철학을 밝히고자 한다.

 

1. 정치의 성립조건

랑시에르는 본서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의 정치적 본성에 관한 분석에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이 정치적이라는 것은, 첫째로 다른 동물과는 달리 말(로고스)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 말을 갖고 있기에 정의의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랑시에르는 이 주장을 평가하면서 비판한다. 두 번째 점부터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정의란 “개인의 가치에 걸맞는 분배를 받는” 것이며, 부정의란 개인의 가치 이상의 “과다함을 탐하는” 것이다. 개인의 경우라면, 자신의 몫 이상을 받지 않으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정의의 경우, 공동체의 공유물의 나눔[분할/공유]을 분배하기 위한 기준, 곧 가치(*)를 설정하고, 그것에 맞춰서 배분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이 두 개의 정의를 분명히 구분했다. 즉, 교정적[시정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이다. 교정적 정의란 거래를 할 때의 손익의 균형을 의미하며, 어느 한쪽만이 이익을 얻지 않는 것이다. 그에 반해, 배분적 정의란 공유물을 배분할 때, 각자가 그의 가치에 걸맞는 몫을 받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 두 가지 정의를 독자적으로 재독해함으로써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즉, 산술(등차) 급수와 기하(등비) 급수라는 대칭 개념을 염두에 두고, 교정적 정의를 산술적 평등이라고 부르고, 배분적 정의를 기하학적 평등이라고 부른다. 산술적 평등이란 가령 동일한 기준으로 상품이 교환되는 것이며, 기하학적 평등이란 각각 다른 기준에 따라 비례적으로 분배가 이뤄지는 것이다. 여기서의 기하학적 평등이란, 각각의 당사자가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가치에 따라, 공권력의 일부를 맡거나 공유재를 받아들일 권리가 비례적으로 배분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면 그 가치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가치를 들고 있다. 즉, 소수자들(올리고이)의 부, 가장 선한 사람들(아리스토이)의 탁월성, 민중(데모스)의 자유이다. 그리고 이런 가치들 각각이 특정한 정체와 결부된다. 즉, 소수의 부자에 의한 과두제(올리가르시), 선한 사람들에 의한 귀족제(아리스토크라시), 민중에 의한 민주제(데모크라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지막으로, 이런 가치를 각자 가지고 모임으로써[추렴함으로써] 최선의 정체가 생겨난다고 결론 내린다. 그런데 이 중 부(富)라는 자격은 산술적 평등에 기초한 가치이다. 또한 최선의 사람들이란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인정하듯이, 부자들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따라서 순수하게 기하학적 평등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가치는 민중의 자유라는 가치뿐이다.

그런데 이 민중의 자유는 사실상 민중에 고유한 것이 전혀 아니다. 민중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민중은 본래 몫이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제에서는 공동체의 지배권조차 요구하게 된다. 이 잘못된 요구는 공동체에 계쟁이라는 해(害)를 가져다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민중이 자유를 주장하는 것을 해와 잘못이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해=잘못(tort)’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랑시에르는 정치의 근거를 가령 계약이라는 산술적 평등에서 찾는 근대의 정치철학에 대해, 기하학적 평등에서 찾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당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 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도로 기하학적 평등은 명백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민중이 초래하는 해=잘못에 의해 처음으로/비로소 역설적으로 기하학적 평등이 밝혀진다고 한다. 즉, 민중이 자신의 자유를 표출(마니페스테)함으로써 근본적인 해=잘못이 초래되며, 그것에 의해 비로소 산술적 평등을 전제로 한 지배의 자연적 질서가 깨지고, 역설적으로 기하학적 평등에 기초한 정치가 어떤 것인지가 밝혀진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민중이 본래 몫이 없는 데도 몫을 요구하고, 그것에 의해 “몫 없는 자의 몫(part des sans-part)”3이 밝혀질 때, 비로소 정치가 성립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계기가 없으면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산술적 평등에 따라 부자가 빈자를 지배하고 있을 때는, 기하학적 평등은 없고, 따라서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약사회나 중앙집권정부라는 형태를 취하든, 불평등의 긍정이라는 야만적인 형태를 취하든, 거기서의 근본 명제는 “몫 없는 자의 몫은 없다”일 수밖에 없다. 거꾸로 빈자가 부자와 대립할 뿐인 경우에도,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부자와 빈자가 투쟁하고 있다면, 산술적 평등에 따라 각자에게 대등한 몫을 준다면, 즉 대립의 원인인 부의 불평등을 제거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정치가 존재하는 것은, 민중의 존재가 산출하는 중단, 해=잘못, 계쟁이 분배의 질서를 중단하고, 근원적인 뒤틀림[꼬임]을 밝게 드러낼 때이다.

랑시에르는 이런 의미에서의 정치를, 서슴지 않고 계급투쟁이라고 부른다. 여기서의 계급투쟁이란 계급과 계급의 투쟁이 아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란 하나의 계급이 아니라, 모든 계급의 해소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란 스스로를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하는 민중(데모스)과 똑같다.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이란 산술적 평등에 기초한 지배질서에 해=잘못을 들여오고, 그것에 의해 정치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의의 참된 의미를 분명히 한다. 즉, 인간이 정치적이라는 것은, 배분적 정의 곧 기하학적 평등의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기하학적 평등이 밝혀지는 것은 민중이 본래 없을 터인 몫을 요구함으로써 해=잘못을 들여옴으로써이다. 정치는 이런 해=잘못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이어서 랑시에르는 앞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의 기반이 되는 첫 번째 조건, 즉 인간은 말을 갖고 있다는 명제에서도 이 해=잘못을 찾아내게 된다.

 

자크 랑시에르 불화(La Mésentente: Politique et Philosophie)일본어 번역본 표지. 不和あるいは了解なき了解 -政治の哲学は可能か, 松葉 祥一 , 大森 秀臣 , 藤江 成夫 翻訳, インスクリプト, 2005

 

2. 정치란 무엇인가?

오늘날 정치란 일반적으로 인간집단 특히 국가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이나 제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이런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를 구태여 치안(police)라고 부르고, 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정치와는 구별한다.4

랑시에르는 치안을 “집단에의 참여와 동의, 권력의 조직화, 지위와 직업의 분배, 이 분배의 정당화 시스템 등이 작동하는 과정의 전체”(LM51)라고 정의한다. 다만 그는 치안을 단순한 정치제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위나 직업의 배분의 제도가, 그것을 정당화하는 “감성적인 것(le sensible)”의 배치(configuration)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치안이란 무엇보다 우선, “신체의 질서이며 …모든 신체에 그 이름에 대응하여 뭔가의 지위나 역할을 할당하는, 행위의 방식, 존재의 방식, 말하는 방식 사이의 나눔[분할/공유]의 무수함을 정의하는” “감성적인 것의 배치”(LM52)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랑시에르에게서의 치안의 문제는 푸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도의 문제인 동시에 신체의 ‘규율화’(LM52)의 문제, 혹은 오히려 “신체의 출현방식의 규칙”(LM52)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 ‘감성적인 것의 배치’란 무엇인가? 랑시에르는 티투스 리비우스(59B.C.-17A.D.)가 『로마건국사』에서 말한 평민의 반란 이야기를 예로 든다.5 즉, 귀족이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일찍부터 불만을 품고 있었던 평민들은 아벤티누스의 언덕으로 도망쳐서 이곳을 점거했다. 원로원의 명을 받은 한 명의 귀족이 거기로 가서, 평민을 설득하려 한다. 귀족의 주장은 단순하다. 즉, 평민은 말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평민과 논의할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평민이 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이름을 갖지 못하고, 국가에의 상징적 등록을 결여하고 있으며, 생명 이외의 아무것도 후세에 전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평민의 말은, “덧없는 것이며, 금방 사라져버리는 소리, 울음소리의 한 종류, 욕구를 알지 못함이며, 지성의 표명이 아니”라는 것이며, 평민은 “과거에 존재하고, 미래에도 존재하는 영원한 말을 결여하고 있다”(LM46)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을 가진 귀족의 말과, 이름을 갖지 못한 평민의 목소리 사이에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반이 없으며, 논의를 위한 코드도 없다. 이에 대해, 평민들은, 스스로를 귀족과 같은 말을 가진 ‘말하는 존재’라고 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창설한다. 즉, 그들은 신탁을 말하기 위한 대표를 보낼 때, 그 대표자에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평민들은 스스로를 말하는 존재라고 한 것이며, 그저 욕구와 고통을 나타내는 울음소리가 아니라, 지성을 표명하는 말을 부여받은 존재라고 했다. 때문에 다시 귀족의 사자가 설득하러 왔을 때, 평민들은 예의바르게 귀를 기울이고, 예의를 차려서 말하지만, 다음에는 협정을 요구하게 된다.

랑시에르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즉, 귀족들은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는 말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분배가 평등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을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평민들은 이 설득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미 평등한 것이다. 이것은 말의 불평등한 분배라는 전제에 반한다. 그리고 이 모순이 밝혀지기 위해서는, 평민들의 시위행동(manifestation*)이 필요했다. 그것에 의해 그때까지는 실효성을 갖지 못했던 평등이 기능하기 시작했다. 평민은 혈통귀족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대고 말을 함으로써 귀족의 지배에 근거가 없음을 밝혀낸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런 상황을 ‘불화(mésentente)’라고 부른다. 그것은 어떤 대화자가 상대가 말하는 바를 듣고[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듣고[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대화상황이며, 또한 그 결과 생기는 대립이다. 따라서 불화는 희다고 말하는 사람과 검다고 말하는 사람의 충돌이 아니다. 불화란 희다고 말하는 사람과 희다고 말하고 있으나 완전히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는 인간 사이의 충돌, 혹은 같은 희다에 관해 말하고 있는 데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 인간 사이의 충돌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화는 무지나 고의에 의해 타인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몰이해와도, 말의 부정확함에 근거한 오해와도 다르다. 또한 이해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분쟁(differend)과도 다르다.6

랑시에르는 이 불화에 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정치의 성립 조건을 간파한다. 치안적 질서에서는 감성적인 것으로서의 말은 나눔[분할/공유]되어 있다. 즉, 말과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은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공유되어 있는 동시에 분할되어 있으며, 이 전제 위에서 치안의 질서가 유지된다. 달리 말하면, 통치가 가능한 것은 둘 사이에 말이 공유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그것과 동시에 둘의 말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7그에 대해 평민들의 행동은, 이 이중성을 폭로한다. 이것이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에 다름없다. 랑시에르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정치를 존재하게 만드는 말은, 말과 그 계산 사이의 간극 자체를 측정하는 말이다”(LM48). 즉, 정치란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자가, 세계의 이중성, 모순, 해=잘못을 폭로하는 것에 다름없다.

따라서 정치적 행위란 당사자들의 존재에 관련된 계쟁이기도 하다. 귀족에게 평민은 말을 갖지 못하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계쟁의 당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의 다음의 말은 결정적이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 “당신들의 불행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행은 피할 수 없다”(LM49), 정치란 우선 논의의 당사자에 공통되는 장면이 존재하는가 여부에 관련된 계쟁이었다. 이 계쟁을 산출하기 위해서, 따라서 정치적 행위에 있어서 우선 필요한 것은 “그 장면을 보지 않는 대화자, 볼 수 없는 대화자를 위해 그 장면이 실재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LM49)이다.

이리하여 랑시에르는 앞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의 첫째 단계에서도 해=잘못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말을 갖고 있다는 얼핏 보기에는 자연적인 평등이, 사실은 말을 갖고 있지 않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배제된 당사자의 표명에 의해 밝혀질 때, 사회에는 해가 초래되지만, 그것에 의해 과거의 정치의 본질인 기하학적 평등이 밝혀지게 되고, 정치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랑시에르는 이제 정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즉, “당사자를 정하는 몫이 있느냐 없느냐를 정하는 감성적인 것의 배치를, 정의상 그 배치 속에 장소를 갖지 않는 전제, 즉 몫 없는 자의 몫이라는 전제에 의해 절단하는 활동”(LM53, 60쪽)이다. 즉, 직업과 부의 분배 시스템으로서의 치안적 질서는 말로 대표되는 감성적인 것의 나눔[분할/공유]이라는 전제에 서 있는데, 이 전제에 기초하여 몫 없는 자로 간주됐던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들도 말을 공유하고 있음을 폭로하고 그 결과 치안적 질서가 우연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혀내는 것, 이것이 정치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행위의 실제 예로서 랑시에르가 드는 것은 사적 관계라고 간주됐던 노사관계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공적 관계임을 폭로한 19세기의 노동자들의 행위이며, 여성에게는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었던 1849년의 선거에 입후보한 잔느 드로왕의 행위이며, 재판관에게 “직업은?”이라는 질문을 받고 “프롤레타리아트이다”라고 대답했을 때의 오귀스트 블랑키의 행위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정치적 행위에 의해 치안적 질서가 타파되고, 정치적 질서가 수립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정치적 질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치안과 정치는 양자택일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은 완전히 이질적이지만, 서로 결부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정치가, 고유한 대상이나 과제를 갖지 못하고, 이른바 타파하는 대상으로서 치안적 질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가 정치적이냐 아니냐를 전제하는 것은, 그 행우의 대상도 장도 아니며, ‘행위의 형식’(LM55)이다. 랑시에르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LM56)고 거듭 강조한다. 거꾸로 말하면, 어떤 행위든 정치적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 가령 선거, 파업, 시위가 정치적 행위로 되는 경우도,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가령 파업은 노동현장과 공동체의 관계들이 재배치할 때 정치적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정치적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그 비판대상으로서 항상 치안을 필요로 하며,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완전히 이질적이며 구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치안과 정치의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는 평등 개념이다. 확실히 평등은 정치의 유일한 원리이지만, 정치에 고유한 개념이 아니다. 평등이란 구현되어야 할 본질도, 도달해야 할 목표도 아니다. 평등이란 그것을 실현하는 정치적 실천 속에서 비로소 찾아지는 하나의 전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평등은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확실히 평등은 그 자체로는 공허하다고 인정한다. 평등이라는 전제는 “그 자체로서는 어떤 특별한 효과도 없으며, 어떤 정치적 일관성도 없기”(LM57)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에는 정치의 가능성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왜냐하면 치안적 질서와 평등의 개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정치적 행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봤듯이 평민의 정치적 행위는 평등하게 언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치안적 질서와의 마주침에 의해 생겨났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란 “평등이라는 전제에 의해 도출되고, 이 평등을 입증하려는 관심에 의해 도출된, 열린 실천의 전체”(LM53)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글은 분량상 세번에 나누어 보내드립니다. 다음에 계속...)

 

  1. 이 텍스트는 랑시에르 자신이 쓴 것임을 확인했다. 아래의 인용은 본문 속의 괄호 안에 LM이라고 약칭하고 원서 쪽수를 표기했다. [본문으로]
  2.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언어를 갖고 있기에 ‘유용한 것’과 ‘유해한 것’에 관한 감각을 갖고, 그 결과 정의에 관한 감각을 갖는다고 한다. 랑시에르는 이 ‘유용한 것’과 ‘유해한 것’의 개념 사이에도 간극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졸고, 「「分け前なき者の分け前」を求めて──J・ランシエール」, 三浦信孝 編, 󰡔来るべき〈民主主義〉── 反グローパリズムの政治哲学󰡕, 藤原書店, 2003년 수록. 또한 이 해설의 전반부는 이 글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일러둔다. [본문으로]
  3. ‘part’는 ‘몫’과 동시에 ‘역할’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서 ‘몫 없는 자의 몫’이라고 번역한 ‘part des sans-part’는 ‘역할 없는 자의 역할’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4. 치안 개념에 대해서는 졸고를 참조. 「「ポリスの論理」と「政治の論理」」󰡔現代思想󰡕, 1999년 5월. [본문으로]
  5. 랑시에르는 19세기의 사회사상가 발랑슈의 논문에서의 인용이라고 한다. Ballanche, «Formule générale de tous les peuple appliquée à l’histoire du peuple romain», Revue de Paris, septembre, 1830. [본문으로]
  6. 리오타르에게서의 분쟁(différend)과 불화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Cf. Jean-Louis Déotte, “Rancière’s Mésentente and Lyotard’s Différend,” Substance, 103, 2004. [본문으로]
  7. Jacques Rancière, «philosophie et politique (entretien)», Magazine littéraire, no 331, avril 1995, p.14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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