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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2일 [책 읽는 점심시간] 세미나 후기

금은돌

 

누군가의 신발, 누군가의 침입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실내화 한 켤레」, 창비. 2016년.

 

 

누군가 노크도 하지

않고, 나타난다.

 

그들을 이어주는 끈은 고등학교 동창생이라는 것.

우연히 TV 프로그램에 나온 ‘경안’(시나리오 작가)을 친구 두 명이 찾아간다. 일방적으로 전화하고, 일방적으로 택시를 타고, 그녀를 만나러 간다. 단지 고등학교 시절, 수학 공부를 같이 했던 사이.

 

동창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들은 타임 슬립을 한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고생의 감각으로, 여고생의 추억으로, 하룻밤을 보낸다. 아줌마가 된 그녀들은 검정 비닐봉지에 온갖 다양한 술과 안주를 챙겨왔다. 대표적인 안주는 수학 선생이다. 수학과 얽힌, 그 선생과 얽힌 폭력적인 얘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밤이 무르익는다. 타인의 방에 침입한 그녀들은 주방을 점거하고, 스테이플러로 보자기 네 모서리를 박아 술상을 만든다. 모든 것이 놀랍다.

 

학연이라는 끈으로 ‘경안’의 시간은 뒤섞인다. 그녀들은 무엇을 얻고 싶었던 것일까?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 경안은 옛 친구의 방문이 기껍지 않다. 작가라는 이유로 과거의 시간과 삶을 공유하고 싶었던 걸까? “혜련”은 처음 만난 남자와 하룻밤으로 성병에 걸렸을 지도 모를 기이한 하룻밤을 보내고, 그 사이에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선미’는 “가스가 폭발하기 직전”의 무거운 기운을 드리운다. ‘선미’는 명쾌하지 않다. ‘선미’는 모른 척 한다. ‘선미’는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선미’는 음흉하다. 아니, 누구나 음흉하다. 그 뒤를 알지 못한다.

 

이 소설처럼, 몇 년 전, 산업체 고등학교로 진학했던 중학교 실절 친구가 놀러온 적이 있다. 친구는 내 거실의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어놓았다. 그 친구에게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었다. 친구는 이마트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친구가 이마트 청소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그 일을 따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늘어놓았지만, 나는 공감하지 못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나의 아파트에 건너 왔다. 같이, 말없이, 9시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더 이상 할 눈빛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를 앞에 두고 어떤 표정을 지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어색해졌다. 우리가 사실, 어떤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지? 친구와 나는 진실로 아는 사이였나? 안다는 게 뭘까? 그 뒤로 그녀와 나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이마트에 종종 물건을 사러 갔을 때, 친구의 옷자락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권여선 작가처럼, 술을 같이 마시지 않아서인지, 우리의 시간은 섞이지 않았다.

 

권여선 작가는 삶의 모서리에 서성거리는 있는 인물 군상들의 일상을 잡아채는 힘이 있다. 그들의 삶을 술자리 만담처럼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소소하고 유쾌하고 명랑하다. 그러다가, 뒤돌아서면, 가슴이 아프다.

 

왜 아플까.

 

인물들은 서로를 아는 것 같았지만, 서로에 대해 모른다. 겉으로는 친한 척 하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표피는 표피를 만나 상처를 입힌다. 표피는 웃는다. 표피는 웃는 척 한다. 표피는 잘 사는 척한다. 무심히, 타자의 삶으로 건너 가 타인의 시간을 훔친다. 스크래치가 생긴다. 스크래치는 뒤늦게 발견된다. 어디에서 생기는지 몰랐다가, 문득, 베인 손이 아려온다. 아픈 곳을 정확하게 짚지 않는 내러티브.

 

손가락이 어떻게 유리 파편에 베였는지, 의뭉스럽게 뭉개버리는 사이. 그녀들에게는 시간이 강이 저만치 흘러가 버린다. 그녀들의 강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금파리 가득했던 강물 속에 세 명의 여자가 맨 발을 담갔다가 발목이 사라진다. 그녀들의 발에 예전의 신발을 신을 수 없다. 중심부를 건드리지 않고, 강가 모서리에 서성거리는 여자들. 신발엔 흙이 묻지 않는다. 그녀들은 어디에 다다랐을까. 알지 못한다. 마음의 강을 건너지 못하며 우리는 권여선 작가의 문체에 홀릭 된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궁금해서,

따라간다.

 

핵심으로 직진하지 않는, 의뭉스러움이, 놀랍다. 다시 따라 읽는다. 일상에서 겪었을 법한 소소한 술자리가 생각난다. 작가들과 만날 수 있었던 레지던시 공간, 권여선 작가의 술자리 풍경이 떠오른다. 그녀의 경쾌한 고갯짓이 떠오른다. 유쾌하게 목을 흔들며, 건배 제의를 하던 소설가의 여리면서도 씩씩한 손목이 떠오른다. 노트북 위에서 그 손목이 파도처럼 넘실거렸을, 그녀만의 독특한 리듬감이 도드라진다. 자유로운 손가락들.

 

몇 차례에 걸쳐, 권여선 작가의 소설을 낭독하면서,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알아서 들려오는 듯했고, 알아서, 더 모르기도 했다. 이렇게 그녀와의 추억을 이야기 하는 나는 권여선 작가를 얼마나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만, 몇 번의 술자리를 했을 뿐. 그 누구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유쾌한 주정뱅이가 되어보지 못했기에, 더더욱 타자와 멀다.

 

 

다음주 5월 19일 세미나 [책 읽는 점심 시간] : 낭독 작품 권여선의 「층」, 󰡔안녕 주정뱅이󰡕

 

5월 26일부터 소설책이 바뀝니다.

황정은의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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