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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영원회귀] 13강 예습글

유택 2018.12.12 15:51 조회 수 : 60

6장_선별의 교의로서의 악순환/영원회귀의 정치적 판본/악순환의 음모  2018-12-13

 

훈련과 선별’의 계획들은 니체의 병리학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인류의 운명이라는 문제도 결코 아니고, 그를 이끄는 것은 인간들의 고통과 비탄에 대한 강박관념도 아니다. 그것은 외부에 대해 행동할 필요성이고, 자신의 의식의 붕괴를 벗어나기 위해 의식들에 스스로를 동화할 필요성이다. 그의 계획들과 기획들(‘미래의 철학’ ‘생성의 무구’ ‘영원회귀’ ‘힘에의 의지’)안에서 말해진 주제들을 전개하기 위해 그가 반복해서 노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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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어떤 목적도 갖지 않지만, 무언가를 실현한다. 우리 인간은 목적을 갖지만, 이 목적이 아닌 다른 것을 획득한다.”

우리의 은폐된 충동들, 우리는 그것들을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의 존재를 가정하는 제도적 언어에 따라 의지로서 해석한다. 힘들의 놀이, 힘들의 관계들, 그것들은 잘못 해석되었다. 명석함이란 어떻게 가능한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명석함은 우리의 예속상태를 인정하는 명석함이다. 그러나 이 명석함의 수준에서만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그리고 자연으로부터도 우리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니체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전망이 그려진다. 첫번째, 영원회귀는 우주가 자신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두번째, 역사의 종착점인 허무주의는 ‘가치들의 가치전환’을 요구하고, 그 가치전환에 의해 종의 새로운 ‘선택’의 기준이 설정될 것이다. 이로부터 일련의 양자택일이 파생한다.

영원회귀의 법칙이 실존의 양상이고 힘이 실존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그 법칙으로부터 의지 자체가 파생한다고 하는 이외에, 이 법칙은 어떤 의지의 개입도 없이 존재들의 선별작업을 수행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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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들의 가치전환의 몇몇 계획들에서 니체 자신이 예고하는 미래의 철학자는 어떤 때는 ‘실험자’로, 어떤 때는 ‘사기꾼’으로 등장한다. 다른 계획들, 훈련과 선별의 계획들에서는 주인과 노예가 문제가 된다.

모든 창조자는 타자를 유혹하는 자인 동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작용할 수 있고, 존재하는 것을 변하게 할 수 있는 힘들의 전체)을 창조하기 위해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타자에 대해서 무언가를 실험하는(시도하는)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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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영역에서 창조하는 것은 곧 존재하는 것에, 따라서 또한 존재들 전체에 폭력을 행하는 것이다. 새로운 유형의 창조는 하나의 위험상태를 유발해야 한다. 그때부터 창조자는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실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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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진리에의 의지’가 어느 정도까지 ‘사물’의 본질로 침투하는가? 특정한 종류의 비-진리가 승리하고 지속되도록 돕고, 서로 연관되는 날조 전체를 특정한 생물종의 보존에 고유한 기반으로 여긴다.

둘째, ‘선에의 의지’는 어느 정도까지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는가? 사람들은 도처에서, 즉 식물이나 동물에게서 그 반대의 것을 보게 된다. 즉 무관심이나 혹독함이나 잔인성을. 다시 말해 세계의 체계에서 선은 불필요한 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이성’은 얼마나 깊게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게 되는가? 목적과 수단에 대한(사실 관계가 아니라, 항상 해석에 의해 투사된 관계일 뿐이라는) 비판, 낭비나 정신착란이란 성격은 전체의 체계 안에서 정상적인 것이다.

넷째, ‘미에의 의지’는 어느 정도까지 펼쳐지는가? 가차 없는 형식들의 발달.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란 가장 강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진’, ‘선’, ‘이성적인 것’, ‘미’ 라고 평가해왔던 것들은 전도된 힘들의 개별적 사례들로서 드러난다. 나(니체)는 인간이라는 종이 스스로를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는 관점주의적 날조를 비웃는다. 인간은 자신을 보존하는 수단들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이 수단들에는 인간은 기만당하길 원치 않는다는 것, 인간들은 서로 돕고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전체적으로, 성공한 인간들은 불운한 인간들의 희생으로 사는 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있다.

 

사기꾼 철학자의 시뮬라크르, 환영 그리고 현실원칙

니체를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시뮬라크르를! 인류의 사기꾼이자 윤색가가 되자!”라는 명제의 충격적인 점을 먼저 강조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짓의 긍정적 개념이 작동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예술적 창조의 근거로서 실존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더 잘 기만하기 위해서 기만을 폭로하는 것. 니체의, 특히 학문적 기만이 가치들을 파괴하며 서구인들을 몰아 간 그 비참함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니체의 실천이 된다. 그것에 대한 치료약은 그러므로 삶의 새로운 조건들을 만들어 내는, 충동들의 창조적 힘을 가치 있게 만드는 재기만remystification일 것이다.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는 유일한 존재는 자신을 표상하고, 따라서 변화하고, 스스로와 비동일적이며, 완전히 상대적인 존재이다”라고, 즉 실존은 날조에 의해서만 유지된다고 단언한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실존이 날조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허무주의는 새로운 허구들을 발명하는 힘과 그것들을 해석하는 힘이 고갈되면 등장한다.”

시뮬라크르를 발명할 수 없는 무력함은 그러므로 퇴화의 징후일 따름이다. 본질적으로 환영들을 생산하는 충동들 이외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뮬라크르는 환영의 산물이 아니라, 그것의 교묘한 복제이다. 그 복제에 의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생산할 수 있다. 자신의 강제력을 행사하기 위해 시뮬라크르는 환영의 필요성에 응답해야 한다. 지성은 환영이 ‘말하려는’ 것을 변형시킨다. 지성과의 관계에서, 시뮬라크르는 지성이 예술에 부여하는 방종이다. 즉 현실원칙을 중지하는 유희.

하나의 목적을 정하는 것,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단지 살아 있는 힘들에 방향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힘들의 새로운 중심들을 유도하기 위해서. 이것이 바로 시뮬라크르가 하는 일이다. 목적의, 의미의, 시뮬라크르를 발명하는 것! 무엇으로부터? 충동의 삶의 환영들로부터. ‘힘에의 의지’로서의 충동은 이미 그 첫번째 통역자/해석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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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인간(개인이 아니라)이 모든 사물과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지각하는지 밝혀 내려고 한다. 그래서 개별 존재들과 집단의 특이성을 제거하여, 이처럼 영속적인 관계를 정립하려고 한다. 학문은 종의 본질을 구성하는 과정을 그냥 계속 진행하여, 몇 가지 믿음을 공고히 뿌리내리게 하고 믿지 않는 자를 가려내어 사멸시킨다.

인식은 기체화에 반대하는, 오직 한 사람에게 있어서만 생존조건이 되는 취향에 반대하는 작업을 한다. 종은 더 허술한 오류이고, 개인은 더 정교한 오류이다. 개인은 다스리고자 한다. 그러나 그때 개인은 스스로가 변화하는 어떤 것이며, 자신의 취향도 자꾸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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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자신 안에서 표현되는 두 대립하는 충동들(하나는 인식, 다른 하나는 종의 보존본능)로 분할될 수 있다. 하지만 인식은 니체의 말에 의하면 종의 보존을 위해 생존조건들을 해석하는 무리적 힘에의 의지가 아니던가?

과학은 원칙적으로는 어떤 과정의 기원에는 아무 의도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을 재현할 때, 그것을 재생산한다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 이미 그 과정에 의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인간이 의도 없는 현상들처럼 행동할 수 있는 날(왜냐하면 인간의 차원에서 모든 의도는 자신의 보존, 자신의 지속에 항상 복종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날 새로운 창조물이 실존의 완전함을 선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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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는 의도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의도가 없는 우리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의도 없는 우주의 완전한 구조는 의도가 있는 존재들을 창조한다. ‘인간’이라는 종은 이처럼 아주 우연히 생겨난 피조물, 거기에서 힘들의 강도는 의도로 전도되는 그러한 피조물이다. 즉, 도덕의 산물이다. 인간의 의도를 힘들의 강도로, 환영들을 만들어 내는 힘들의 강도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시뮬라크르의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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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현실이란 개념은 인격의 완전함이라는 도덕적 현실을,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 종의 특유한 고정성을 확증한다. 앎을 통해 자신의 근본적인 존엄이 구성되는 자가 어떻게 이 존엄을 자신의 앎을 통해 의문에 부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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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정점과 문명의 정점은 별개로 성립된다. 문화의 위대한 순간들은 도덕적 의미에서 부패의 시기들이다. 인간이 의지하고 획득한 강제(문명)의 시기들은 가장 정신적이고 가장 대단한 존재들에 대한, 그리고 가장 적대하는 자들에 대한 불관용의 시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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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현실원칙과 (무리적 기원의) 도덕의 현실원칙은 의식과 제도적 언어에 의해 혼동되어, 니체는 그것들을 분리하고, 대립시키고, 마침내는 폐기한다. 그때 그는 주어진 상태에 대한 평가를 강요하는 힘이 유일하고 유효한 현실이라고 선언한다. 이 힘이 개인과 사회에 결여되자마자, 이 개인과 사회는 도덕과 과학이라는 두 원칙을 무리적 언어의 현실원칙이란 형태로 혼동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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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토대들로부터 해방된 과학, 어떤 제도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신들의 실험에 필요한 수단들을 얻기 위해서 어떤 산업에도 의존하지 않는 소수 개인들의 집단의 손에 장악된 과학. 그것이 니체에게는 모든 가치들의 가치전환의 계획에 전제가 되는 구체적 조건들의 환상적 표상이다. 과학의 관점에서, 가치전환은 지식이 사용하는 수단들이 많아질수록 목표와 목적에 대한 배려는 덜 중요해진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다. 목적들의 숫자만큼 수단들이 있다. 추구되고 도달된 목표는 단지 새로운 수단들을 생겨나게 하는 구실일 뿐이다. 창조하는 것, 그것은 자의적인 특이성이 승리하는 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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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안정을 오로지 보존 안에서, 보존에 의해서 추구하는 이상, 인류는 그만큼 더 불안정에 빠진다. 실존의 작인들의 수가 증가함에 비례해서 각각의 힘은 감소한다. 전체로서의 종은 각각의 특이성을 고려하는 실존의 유일한 작인으로서 행동하는 법을 모른다.

첫째, 지금까지 인류를 한 개인으로, 따라서 실존의 유일한 작인으로 취급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가치들의 새로운 일람표, 따라서 하나의 목적,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 문제이므로, 그 가치들은 오직 개인들에게만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자신의 교의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각자 안에서는 무리적 관계를, 그리고 전체 안에서는 종의 후견인적 심급들에 근거하는 것을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삶을 있는 그대로 재의지하기와 같은, 명령에 의한 교의의 도덕적 선별을 포기한다. 그러나 그는 ‘무리적’ 의식을 여전히 요구할 모든 이들에게, 악순환의 이름으로 ‘절망’이 군림하도록 하는 은폐된 활동의 필요성에 집착한다.

영원회귀의 교의를 ‘전수받은 자들’은 ‘악순환’의 부조리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아, 전세계적인 균등화로부터 초래된 경련들의 의지된 순간으로부터 위버멘쉬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기 위해 주저 없이 행동하고 개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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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짓기의 중요성과 인구의 증가는 산업적 현상의 이면일 뿐이다.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서 착취는 대량의 수요를 평균적으로 충족시킨다는 명목으로 개인들의 욕구의 자발성을 완전히 조건화된 반사들로 대규모로 대체할 것을 요구한다. 이 임무는 인간본성에서 감정적 힘의 증대를 유발하는 모든 충동을, 특히 작인으로서 개인을 초월하는 모든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유용한’ 특수성을 위태롭게 하는 개인의 모든 성향을 말살하는 것이다.

전체성은 잉여에서 오로지 반항적이거나 병적이거나 퇴행적인 자신의 일부밖에는 보지 못하므로, 그 자신의 ‘잉여’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 집단, 이 특이적 사례는 전체성이 자신에게 품는 분노,적의,질책으로부터 자신의 힘을 길어 올린다. ‘잉여’라는 말은 산업적 과정 자체에 의해 새로운 ‘주인과 노예’의 카스트가 형성되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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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지배계급이라는 거짓 계급이 그것으로, 이 계급은 대중 속에 감춰져 있는 가장 희소한 개인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의 은밀한 계급(일반적 이익에 동화하지 않는 ‘잉여의 인간들’이 형성하는 계급)을 그들의 가장 저급한 과업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지배자들’(산업가, 군인, 은행가, 상인, 공무원)은 그들의 다양한 업무들에 의해 사살상의 노예들일 뿐이고, 그들도 모르게 이 은폐된 주인들을 위해서, 따라서 삶의 ‘가치들’과 의미를 끊임없이 형성하는 관조적 카스트를 위해 일한다.

지금은 은폐된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어느 날 한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악순환의 기호는 그 부조리와 실존의 절대적 무의미의 모든 광휘 속 보편의식의 창공에서 빛날 것이다. 이 사건은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은폐된 위계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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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운동안에서 평균적인 인간과는 다른 형성 조건들과 보존 조건들을 지닌 더욱 강한 종, 더 높은 유형이 출현해야 한다. 위버멘쉬. 더 높은 귀족주의 형식은 미래의 형식이다.

지금까지 ‘교육’은 사회의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미래를 위한 가능한 한 최대의 이익이 아니라, 지금 현존하는 사회의 이익을 말이다. 오늘날의 평균적인 보존에 대한 관심과는 반대인 보존에 대한 관심을 통한 고립. 역전된 가치들의 실행. 파토스로서의 거리. 오늘날 가장 과소평가되고 가장 비난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 안에서의 자유로운 의식. 유럽인의 평준화는 오늘날 되돌릴 수 없는 거대한 과정이다. 오히려 그 진행을 더 촉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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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게 정의가 필요 없다면, 그것은 삶이 부정을 감당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는 것이다. 니체의 음모적 환영이 시작된다. 누가 이 인간유형을 발달시킬 것인가? 니체가 말한다. 그 인간유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발전하고 있는 목표와는 반대로 보이는 과정-평등화(따라서 산업사회가 실천하는 민주와의 이면에 있는), 그것은 니체에 있어 인간의 왜소화를 의미한다-과 싸우기보다는 단지 그 과정을 촉진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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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구적 관리’의 유일하고 유효한 ‘합법화’로서, 무리적이고 근면한 전체성의 맥락 안에서 ‘비생산적인’ 삶의 방식을 주권의 속성으로 하는 인간 유형을 부양하는 과업을 정하는 것, 그것이 기생을 신성화하기에 이른다. 최고로 비생산적인, ‘지고의 카스트’의 출현이 ‘악순환’ 속에 새겨져 있음을 니체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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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는 이제부터 영원회귀의 교의가 실험 도구로 전도된 진정한 동기로 보인다. 사유는 사유 밖에서 사유 없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유효성을 가져야 한다. 이 사유는 장기적으로 사건으로서 도래하기를 원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강한 존재들은 지금까지 실제적으로 배제된 예외적이고 특이적인 사례들일 뿐이다. 다윈이 제시하는 선택은 부르주아 도덕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것은 외부의 음모, 제도들의 과학과 도덕의 음모이다. 이에 대항해 니체는 악순환의 음모를 계획한다.

오늘날 하나의 기술이 된 산업주의는 이렇게 니체의 계획의 한 측면을 실현하면서, 정확하게 그(니체)의 공리의 반대물을 형성한다.

 

7장_아버지의 망령과의 상담

 

의미가 어떻게, 해석하려는 의지가 일부러 빠지는 거울들의 유희에 의존하는 동시에, 자신의 자의성의 공허함을 벗어나기 위해 필연성을 위장하는가를. “어떤 해석도 필요 없이 하나의 텍스트를 읽을 수 있기”. 니체의 이 절실한 요구는 모든 의미작용이 항상 초래하는 예속성에 대한 자신의 반항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작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해석할 수 없는 실존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줄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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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이렇게 오이디푸스 도식을 역전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아직 살아 있는 어머니의 반대물인 죽은 아버지의 망령을 자신의 앞에 세우기 위해서, 그의 가족, 어머니와 여동생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야 했다. 현실의 어머니는 (그의 여동생과 함께) 가장 증오하고 가장 경멸하는 형상 하에서 삶의 이미지 자체가 된다. 니체에 있어서 어머니는 그 자체로 삶을 표상할 수가 없지만, ‘삶의 의미와 가치의 오염’은 표상할 수 있다. 죽은 아버지, 아버지의 망령은 이제 삶의 의미, 삶의 가치의 기호가 된다. 하지만 삶 자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니체는 자기 자신의 어머니로서 스스로를 다시 낳아서 그 자신의 피조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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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나를 천천히 해방시켰다. 마찬가지로 병에 의해 나는 모든 관습들을 전복하는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병은 내게 망각을 허용했고, 망각을 처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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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영원회귀의 계시로부터 결론들을 끌어내려는 시기에 맞닥뜨린 루와의 연애사건은 하나의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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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행위가 탈중심화를 가속하는 것은 니체의 본성의 한 부분이었다. 창조(모든 창조)는 불균형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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